학교, 능력주의의 공장

     

한국이 세계 최고의 학력주의 사회라는 말은 곧, 한국이 세계 최고의 능력주의 사회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과거제도가 도입된 천 년 전부터 한국은 ‘능력으로서의 학력’을 숭앙했다.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주국 중국보다 까다로운 검증과정도 도입했다. 근대에 들어서고 공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나서도 능력주의는 지고의 선발원칙이자 정의였다. 민족의 수난, 개인의 고통은 힘이 없기에 짊어져야 할 멍에였다. 살아남고, 강해지고, 출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학력이었다.

학력주의와 능력주의

학력주의의 학력(學歷)과 학벌주의의 학벌(學閥)은 동일한 뜻이 아니다. 학력은 ‘개인의 교육경력’이라는 포괄적 의미뿐만 아니라 “제도교육 틀 안에서 일정 단계의 학교 교과과정을 이수하였다는 이력”을 의미한다. 일종의 신임장 내지 자격증인 것이다. 이정규는 학력주의를 “학력의 실질적 가치보다는 상징적인 가치가 능력과 실력으로 간주되어 과도하게 중시되는 관행과 경향”[1]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학벌은 한자의 직접적 의미로는 ‘학문의 파벌’이고 일반적으로 “출신 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패거리”[2]를 가리킨다. 학벌주의를 이정규는 “학연에 바탕을 두고 파벌을 이루어 정치적 파당이나 붕당, 사회경제적 독과점, 문화적 편견과 갈등 및 소외를 야기하는 관행이나 경향”[3]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는 종적 분화냐 횡적 분화냐의 차이를 나타낸다. “(학력주의가) 학력의 종적 분화에 의한 결과로서 개인의 형식적인 업적주의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 (학벌주의는) 학력의 횡적 분화에 의한 결과로서 집단적인 귀속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4]

이런 개념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는 많은 연구에서 “학력·학벌주의”와 같은 형태로 사용된다.[5] 이때 학력·학벌주의는 능력주의(실력주의, 업적주의)와 대비되는 이념으로서,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를 “불가분의 이념체계로 간주한”[6] 개념이며, 이는 “학력·학벌이 사회의 모든 부문과 연관되어 유기체와 같이 기능하고 있다”[7]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학력주의는 학벌주의(學閥主義)와 같이 쓰이면서 능력주의와 상반되는 가치체계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정책적, 이론적 접근[8]에서 학력주의·학벌주의와 능력주의를 충돌하는 가치로 놓는 경향이 강하다. “학력주의를 극복하고 능력주의 사회로 변모”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그 예다.[9] 일반 한국인들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학력·학벌을 능력과 동일시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10]이 있는 반면, “대체로 한국 사회가 학력·학벌주의적 사회라는 점에 동의하며 기업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학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11] 정리해보면 ‘학력’과 ‘능력’은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인식되지만, ‘학력주의’와 ‘능력주의’는 모순되거나 상반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 글은 위의 입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학력주의(학벌주의)와 능력주의를 비교한다. 필자는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와 상반되거나 충돌하는 관계가 아니라 유사하고 비례적인 관계라는 입장을 택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팽배했고, 이 때문에 학력주의는 되레 악화되고 다른 사회 문제들까지 심화되고 말았다. 능력주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理想化)가 학력주의라는 문제의 핵심이다. 학력주의의 바탕에 도사린 근본적인 문제는 능력주의이다.

박남기는 “한국이 학력을 기준으로 지위를 배분하는 사회가 아니라 객관적 시험을 통해 지위를 배분하는 실력주의 사회 요소가 미국에 비해 상당히 높았었다”[12]면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학력과 개인 실력 간의 일치도가 아주 높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부금 입학제도가 발달한 미국은 부모의 배경이 자녀의 대학 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다. 반면 한국은 “시험 국민”[13]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삶의 전 단계가 공개경쟁시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추천제나 기부금 입학 제도를 혐오하며, 같은 문제를 풀어 ‘전국 1등부터 꼴찌까지’ 분명히 가려져야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제도와 문화 역시 그렇게 형성되어 왔다. 그런데 필기시험이 실력을 측정하기에 부적합하다는 비판이 일어나자 심층 면접 등의 방식으로 선발제도가 바뀌었고, 역설적이게도 부모의 배경이나 문화 자본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기존의 능력주의적 특성이 오히려 약해지고 말았다.[14] 일제고사식 시험을 통한 선발이 보편화된 사회일수록 유능한 인재가 특정 대학에 집중되고, 그들이 졸업하고 다시 입사시험을 볼 때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므로 다시 비슷한 사람들이 좋은 직업을 독점하게 된다. 그래서 박남기는 “한국의 과도한 경쟁, 교육전쟁, 학벌, 사회 양극화 등은 실력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과도한 실력주의가 가져온 폐해”[15]라고 지적한다.

한날한시에 전국의 고등학생이 일제히 같은 문제를 푸는 수학능력시험의 성적도 온전히 개인 능력이라고 보긴 어렵다. 학부모들 역시 ‘고학력 획득(63.1%)’과 ‘일류대 입학(57.3%)’에 미치는 부모 배경의 영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한다.[16] 현실적으로 부모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외부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며 능력주의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이상적 형태를 가정하더라도 분배 정의의 최상위 원칙으로는 채택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다룬 장에서 따로 논의한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학력주의 사회라는 말은 곧, 한국이 세계 최고의 능력주의 사회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과거제도가 도입된 천 년 전부터 한국은 ‘능력으로서의 학력’을 숭앙했다.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주국 중국보다 까다로운 검증과정도 도입했다.[17] 근대에 들어서고 공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나서도 능력주의는 지고의 선발원칙이자 정의였다. 민족의 수난, 개인의 고통은 힘이 없기에 짊어져야 할 멍에였다. 살아남고, 강해지고, 출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학력이었다.


“학교는 능력주의를 생산하는 공장”

“배워라. 배워야 한다. 상놈도 배우면 양반이 된다.”
“가르쳐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쳐라. 그나마도 못하면 고학이라도 해야 한다.”
“공자 왈 맹자 왈은 이미 시대가 늦었다. 상투를 깎고 신학문을 배워라.”[18]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귀천과 빈부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학문에 힘써 사물의 이치를 잘 아는 자는 귀인과 부자가 되는 것이고 무학한 자는 빈인과 하인이 되는 것이다’라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선언[19]은, 이른바 ‘동아시아 근대성’의 실체를 명징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후쿠자와의 주장은 당시 많은 대중에게 입신출세를 위해선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근대화는 곧 학교화였다. 근대학교체제로 빠르게 전환되는 상황에서 신분 상승의 갈증은 뜨거운 교육열로 치환되었다.

후쿠자와의 글에서 잘 드러나는 바이지만, 그와 같은 근대화론자에게 인간의 평등은 명목상 출발선일 뿐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우월해지고 강해지는 것’이다. 구미열강처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그들의 지식을 빠르게 학습할 인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면 그만큼 출세의 길이 열리는 체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실제로 제국대학 엘리트들에겐 막강한 특권이 주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신분 상승의 통로가 막혀 있던 이들에게 그것은 눈부신 진보이자 평등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진보였다. 동시에 학력주의의 시작이기도 했다.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학력주의는 일본인의 삶을 규정하는 이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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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엔 지폐에서의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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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은 어떤 면에서 일본보다 더욱 철저히 혹은 처절히 학력주의를 추구해온 사회였다. 한국에서 이른바 명문대 출신의 고위공직 독점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중 46.7%가 서울대 출신이며, 연세대와 고려 출신까지 더하면 그 비율은 63.6%에 달한다.[20]

학력주의에 대한 여러 의식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에 출신학교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며 이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21]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학력·학벌을 인간 능력의 구현체라고 믿”[22]는다. 이 모순적 인식은 학벌과 능력의 상관관계가 특수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0%에 달하고, 총 400여 개 대학교에 350만여 명 이상의 대학생이 재학중이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열패감과 좌절감에 시달린다. 능력이 있음에도 그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좋은 대학, 좋은 과를 가지 못했기에 열악한 처우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 한국 청년 세대에게 최초로 입학한 대학은 카스트 제도처럼 결코 극복할 수도 부정할 수 없는 위계서열로 수용되고 있다.[23]

해방 이후 지금까지, 현대 한국 사회 능력주의의 역사는 학력주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요소 동원형 경제체제[24]였던 한국에서 노동력의 양과 질은 결정적 변수였고, 따라서 경제구조의 변화와 부침은 교육 및 학교 제도와 긴밀히 연동되었다. 학력의 획득은 지위상승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개인에게도 절실한 삶의 과제였다. 학업성취는 능력, 즉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여겨졌다. “학교는 능력주의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25]


학력주의의 제도적 형성

갑오개혁 이후 ‘학교령의 시대(1906년)’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소학교, 외국어학교, 사립교육기관들이 사회적 수요와 필요에 따라 연관성과 체계성 없이 다양한 형태의 학교가 난립했다. 공교육 제도의 기초라 할 입학연령이나 교육연한도 규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1899년 이후 학교는 점차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1899년 칙령 제7호가 규정한 의학교관제에 따라 종두의 양성소가 의학교로 개칭된다. 이어서 칙령 제28호가 상공학교관제를 규정해 실업교육체제를 정비했다.[26]

1906년에는 사범학교령, 고등학교령, 외국어학교령, 보통학교령이 동시에 공포되면서 입학자격요건으로서 학력조항이 명확하게 규정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사범학교 본과의 경우 ‘보통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 고등학교 본과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와 이와 동등한 학력을 가진 자’에게 입학을 허용하도록 법령으로 규정하였다.(구한국관보 1906.8.31.)[27] 행정관료, 의사 등 전문직업, 교사 등의 임용에서 학력은 빠른 속도로 공식적인 자격으로 제도화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이 직업의 종류가 단순하였고, 소위 ‘괜찮은 직업(decent job)’은 더욱 한정적이었다. 의사, 법관, 교원 등의 선호직업군이 특정 학교 출신자들에게 독점되면서 학력의 가치는 대중에게 빠른 속도로 각인되었다.

근대적 의미에서 시험성적 경쟁이 노골화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03년 한성사범학교는 졸업생 중 우등자 7명, 급제자 17명의 명단을 공시했다.[28] 1910년대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등의 중등학교 성적표, 학적부 등에 석차가 표기되었다. 1912년 무렵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성적순으로 줄을 지어 교실에 들어가게 한 적이 있었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첫 입학생들을 입학성적순으로 자리에 앉게 했다.[29] 이 ‘석차(席次)’제도는 일본에서 먼저 실시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은 근대적 학교 설립을 통해 근대적 교과내용을 가르치는 것과 함께, 경쟁을 통한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입학시험제도를 통해 학교급 간 위계를 정비하고, 학내시험을 통해 경쟁적인 학습방식을 강조했다. 그런 학교들 중 대표적인 학교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1855년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었다. 게이오의숙에서는 과목별 성적과 석차를 기입한 학업근타표(學業勤惰表)와 시험점수에 따라 자리를 정하는 석차제도를 실시했다. 이 석차제도가 일본 내 근대적 학교에 확산되면서 폐해도 커졌다. 때문에 1894년 문부성 장관이 훈령을 발표하여 소학교 내에서 성적에 따라 자리 순서를 정하는 것을 금지시킬 정도였다.[30]

일제 강점기에 보통교육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확대된 반면 고등교육기관의 확장은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상급 학교일수록 높은 지위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됐고, 이에 따라 학력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교육제도의 형성기인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학력이 지위 결정에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것은 해방 이후 폭발적인 교육열로 분출되게 된다.


승자는 능력주의, 패자는 평등주의

해방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 성립까지의 시기(1945년-1962년)는 경제적으로 볼 때 ‘본원적 자본축적기’[31]라 할 수 있다. 전쟁으로 대부분의 자본 축적 기반이 파괴된 상황에서 남한이 원조경제[32]를 통해 초기 축적을 시작한 때이며, 미국에게 원조 받은 자금과 물자를 매개로 한 정경유착이 싹트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 시기는 “모두가 가난하지만 평등한”[33] 시대였다. 좌익 정치 운동이 탄압받고, 노동조합 등의 매개 집단을 통한 집단적 지위 상승 통로가 사실상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34], 국민들은 학력획득, 고시 등과 같은 개인적 경로를 통한 지위 상승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정규는 이 시기가 “일반 대중이 지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학력은 개인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 선별 장치였으며, 또한 지위 상승을 위한 최선의 기제였다.”[35]

한편 그레고리 헨더슨은 현상에 대해서는 앞의 논자와 같은 진단을 내리지만 정치문화와 관련해 이 시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중앙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올라가는 한국 사회 특유의 권력 지향성이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부가 평준화되면서 점점 더 폭넓게 경쟁하게 되고, 동일한 목표를 위해 차이는 적으면서 정부 권력의 비호는 더 받는, 민족과 문화에서 동질적 대중사회의 정치적 이미지가 더 깊게 새겨졌다. 민주적인 형태의 정치제도를 구축하는 데 불가결한 이익집단의 결성 및 논쟁과 타협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도 되기 전에 거의 토대가 무너져버렸다.”[36]

1972년 이후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재벌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경제성장 추이는 기록적으로 가팔랐다. 산업구조가 재편되며 소위 고급인력 수요도 증가했다. 베이비부머의 등장으로 중등교육은 크게 팽창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대학 정원을 억제했다. 그 때문에 대졸자 공급이 부족해져서 대졸자 임금이 상승하고 대졸자와 고졸자 간 임금 격차도 크게 벌어지게 된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법고시 등 고시를 통해 지위 상승을 꾀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1974년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정책은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능력주의와 평등주의가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공론장에서 격돌을 벌였다. 평준화 찬성 측은 지나친 입시경쟁과 교육비 부담을 이유로 들었고, 평준화 반대 측은 학력 저하와 자유경쟁 원리를 근거로 들었다. 당시 논쟁에서 평준화 반대 측이 가장 애용했던 논리는 사회진화론이었다. 『경향신문』사 회장 최석채는 1975년 11월 3일자 칼럼에서 “인간사회의 생존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규정하고 평준화는 “적자생존의 철칙을 무시해 학력 저하만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했다.[37]

평준화 정책은 대다수 학부모가 찬성했기 때문에 그래도 유지되었다. 평준화가 되면 교육기회를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학 서열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중고등학교만 평준화하는 것이 평등주의의 실현이 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평준화는 모든 고등학교를 대학입시학교로 만들게 됐고, 학교 간 경쟁이 격화되며 학교 내부는 우반(優班)과 열반(劣班)으로 나뉘며 학생들 간의 갈등도 커졌다. 1975년 전남 순천에서는 사소한 시비 끝에 열반 학생이 우반 학생을 우산대로 찔러 죽이는 사건까지 발생했다.[38] 그때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한국에서 대학 평준화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능력주의자들은 당시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학력주의와 능력주의

1987년 민주화운동이 만들어낸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임정권과 차별화를 하겠다며 고교 평준화 폐지를 약속했고, 이에 따라 1990년대 초반 각 지역별로 평준화 정책이 폐기되었다. 일단 고삐가 풀리자 짧은 기간 동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외국어고, 과학고들이 차례차례 생겨났고 중산층 학부모의 욕망에 맞춰 공교육 체제는 급격히 대학을 향한 무한경쟁체제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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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 [1], 퍼블릭 도메인, 링크


1995년 김영삼 정권이 5.31 교육개혁을 발표하며 대학설립준칙주의, 대학정원 자율화를 시행하면서 순식간에 대학 정원이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가 역대 최고의 대학 진학률이다. (2008년 고졸자의 고등교육(4년제, 전문대) 진학률은 83.8%[39]로 정점을 찍은 뒤, 학령인구 하락 등으로 조금씩 하락하는 추세다.) 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의해 실업자와 불안정·비정규직 노동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학교육의 팽창은 박정희 정권기와 대조적으로 대졸자의 공급과잉을 초래했고, 청년층의 취업경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화되었다.

과거에 대학에 가는 것은 우월성의 지표였지만 이 시기에 와서 그것은 정상성, 평균성의 지표가 됐다. 대학에 가지 않는 쪽이 훨씬 소수였기 때문이다. 반면 다들 대학에 가는 시대에 대학에 안 가는 것은 열등성의 지표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학은 ‘필수’가 된다. 대학 졸업장의 가치는 떨어지는데 취업시장의 경쟁자는 엄청나게 늘어나는 상황이 된다. 그 상황에 대한 청년 세대의 반응이 바로 극단적 ‘대학서열주의’의 내면화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작은 차이는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오찬호는 이 대학서열주의가 “대학 졸업장 유무를 대강 따졌던 그런 투박한 학력주의가 아니며 자기들끼리 뭉치는 학벌·학연주의도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이십대들이 수행하는 ‘학력의 위계화 된 질서에 관한 집착은 과거의 학력주의보다 훨씬 정교해졌고 자기 내면화의 강도도 훨씬 높다. 이들에게 학력에 근거한 비교와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이를 의문시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40]

한편 김경근의 연구[41] 는 한국 청소년 다수가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논문에 따르면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문항에서 청소년들은 높은 수준의 능력주의 태도를 보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성향이 본인의 계층이나 학업 성적과 크게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각자의 출발선이 아무리 달라도 객관적 지표나 성적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아마도, 약자‧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 정책(affirmative action)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원천일 수 있을 것이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이정규, 『한국사회의 학력학벌주의: 근원과 발달』, 2003, 19쪽 
[2] 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 2001, 21쪽; 이정규, 같은 책, 20쪽에서 재인용 
[3] 이정규, 같은 책, 21쪽 
[4] 김용옥, 「관료 행태와 학벌」, 『한국행정학보』 제12권 128-137쪽; 이정규, 같은 책, 21쪽에서 재인용 
[5] 박남기(2016), 김부태(2011), 이정규(2003) 
[6] 이정규, 같은 책, 13쪽 
[7] 김부태, 「한국 학력․학벌주의 인식체계 분석」, 『교육학연구』 제49권 4호, 2011, 27쪽 
[8] 이정규(2003) 강창동(1993) 김부태(1993) 김상봉(2001) 양정호(2012) 권성민․정명선(2012)등을 참고하라. 
[9] 최돈민, 「학력주의에서 능력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방안 탐색」, 『교육종합연구』 제7권 제3호, 2009, 114쪽 
[10] 김부태, 같은 책, 33쪽 
[11] 김부태, 같은 책, 40쪽 
[12] 박남기, 「실력주의사회에 대한 신화 해체」, 『교육학연구』 제54권 제3호, 2016, 77쪽; 여기서 실력주의는 능력주의와 동일한 의미다. 
[13] 이경숙,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2017 
[14] 박남기, 같은 책, 77쪽 
[15] 박남기, 같은 책, 78쪽 
[16] 이정규․홍영란, 「한국사회에서의 학력의 가치 변화 연구」, 한국교육개발원 연구보고서, 2002, 161쪽; 김부태, 같은 책 34쪽 
[17] 우드사이드, 같은 책, 25쪽; 본문의 과거제도 논의를 참고하라. 
[18]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중․단편 대표소설 선집』, 다빈치, 2000, 16-17쪽 
[19] 福澤諭吉, 『学問のすゝめ』, 福澤諭吉, 1872 
[20] 유희연, 「서울대 독식 심화」, 『문화일보』, 2004.9.6 
[21] 김부태, 같은 책, 40쪽 
[22] 김부태, 「한국 학력․학벌주의 인식체계 분석」, 『교육학연구』 제49권 4호, 2011, 42쪽 
[23] 오찬호, 같은 책, 2013 
[24] 데이빗 코우츠는 한국경제 유형을 일본경제의 한 극단화된 형태로 본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라. “핸더슨이 아주 적절히 명명한 “기적의 어두운 측면”을-특히 노동탄압과 여성 노동자들의 착취를-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밖으로 보기엔 중립적인 크루그먼의 “요소동원”이라는 용어와 일본 기업과 일본 노동자를 연결하는 특별한 “신뢰” 관계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의 밑에는 장기간 노동, 강도 높은 작업과정,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끊임없는 경영진의 압력, 사회적 통일성이란 국민적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노동 저항을 최소화시켰던 섬뜩한 사회적 현실(현재도 그렇다)이 깔려 있다. 노동권의 실질적인 억압은 (일본의 기준에서도 보아도 임금은 낮고 작업시간은 긴) 한국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데이빗 코우츠, 이영철 옮김, 『현대자본주의의 유형: 세계 경제의 성장과 정체』, 문학과지성사, 2003, 399-400쪽 
[25] 한숭희, 「능력주의의 함정」, 『매일경제』, 2008.12.23. 
[26] 이광호, 「근대 한국사회의 학력주의 제도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학력주의의 발생적 기원과 형태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17호 3권, 1994, 156쪽 
[27] 이광호, 같은 책, 159쪽 
[28] 이원호, 『개화기 교육정책사』, 문음사, 1987, 124쪽 
[29] 보성중고등학교, 『보성80년사』, 1986 90-91쪽, 이충우․최종고,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푸른사상, 2013, 58-59쪽; 이경숙, 같은 책, 114쪽에서 재인용 
[30] 天野郁夫, (『試験の社会史 近代日本の試験・教育・社会』東京大学出版会, 1983; 이경숙, 같은 책, 112-113쪽에서 재인용 
[31] 김용조·이강복,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이해』, 새미, 2006, 26-45쪽 
[32] 냉전질서의 한 축인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경제를 가리킨다.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남한은 미국 중심의 국제 분업체계에 편입되게 되었는데 경제 기반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미국으로부터 원자재, 생산장비, 저리의 자금 등을 받아 다시 기업에 불하하는 형태의 경제를 운영하게 된다. 
[33] 김두환, 「한국의 고등교육 팽창과 교육 불평등」, 『압축성장의 고고학』, 한울, 2015, 107쪽 
[34] 김동춘, 「한국의 근대성과 과잉 교육열: 한국의 국가형성과 ‘학력주의’의 초기적 형성, 한국의 근대성과 전통의 변용」, 정신문화연구원, 1999, 114쪽 
[35] 이정규, 같은 책, 125-126쪽 
[36] 그레고리 헨더슨, 이종삼·박행웅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2013, 387쪽 
[37] 황병주 외, 『1970, 박정희 모더니즘』, 천년의 상상, 2015, 204쪽 
[38] 황병주 외, 같은 책, 211쪽 
[39] 교육부․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40] 오찬호, 같은 책, 108쪽 
[41] 김경근,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 『교육사회학 연구』 제26권 제2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