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과 시장의 부활

     
그러나 총을 들고 장사행위를 막아도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으며 저항까지 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난 주민은 옛적 그 ‘착한 백성’이 아니었다.

1. 위기의 시작, 고난의 행군

북한 경제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이 노정되고 집단적 노력 경쟁 운동은 피로를 더 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경제권의 해체로 대외무역이 급감했다. 에너지를 비롯한 주요 자원의 부족은 경제를 무력화했다. 그 결과 북한이 공식적으로 실패를 인정한 3차 7개년 계획(1987~1993년)의 중반 무렵인 1990년부터 마이너스성장 상태에 빠진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에는 자연재해가 겹쳤다.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했다. 굶주림이 폭풍처럼 밀려왔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공장가동률이 30% 미만으로 떨어졌다. 흔히 ‘3난’으로 표현되는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은 북한 체제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북한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갔다.

【표 4-1】 북한의 경제성장률(%)
※ 출처 : 한국은행, 「북한 GDP 추정결과」, 각년도.


2. 배급제의 붕괴

재앙의 시작은 배급제의 무력화였다. 배급제는 사실 1987년부터 파행적으로 이어오던 중이었다. 1973년부터 변화없이 유지했던 배급제는 1987년에 후퇴한다. 식량배급량을 10% 줄인 것이다. 대신 줄어든 식량을 대체하기 위해 각 부문의 산업노동자들에게 소규모 텃밭 경작을 허용했다. 더불어 기업체를 통해 노동자들이 주어진 텃밭에서 영농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하게 했다. 줄어든 만큼의 식량을 ‘자력갱생’으로 마련하라는 뜻이었다. 이 와중에 1991년 소연방의 해체와 1994년 중국쇼크가 발생했다. 두 가지 쇼크는 기존의 북한 경제 시스템을 근저로부터 뒤흔들게 된다. 이때부터 배급제가 사실상 작동을 멈췄다. 배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사회계층에게 절망적 상황이 닥친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 근로자의 임금은 ‘생활비’로써의 의미를 상실했다. 식량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인 1일, 600g 정도 배급되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줄었다. 줄어든 식량은 시장에서 구입해야 했지만 1달 임금으로는 2kg의 쌀을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쌀의 1/2~2/3 정도의 가격을 유지하는 옥수수를 구입한다 하더라도, 1달 임금으로는 성인 1인의 1주일 식량조차 구입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92년 초에는 김정일이 “국가가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정상노임의 60% 수준을 유지하라”고 할 정도로 노동자의 임금조차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1992~1993년경에 시ㆍ군이 자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1995~1996년경에는 공장ㆍ기업소도 자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드디어 배급이 완전히 끊긴 것이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이 ‘미공급기’라고 부르게 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3. 생존을 위한 투쟁

당에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투쟁할 데 대한 구호를 내놓은 것은 모든 간부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항일혁명선렬들이 《고난의 행군》시기에 발휘하였던 수령옹위정신, 자력갱생의 정신, 난관극복의 정신,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을 가지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 내며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부닥친 애로와 난관을 용감하게 뚫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전진을 이룩함으로써 우리의 일심단결의 위력, 우리식 사회주의의 위력을 더욱 높이 떨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투쟁하자면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시련을 뚫고 힘차게 전진하여야 합니다.
김정일, “일군들은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일해야 한다”(1996.10.14)
배급이 멈추자 공장ㆍ기업소도 국가로부터 자금 및 물자를 정상적으로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공장ㆍ기업소를 가동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물자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8.3 작업반, 부업지 경작, 외화벌이 등 계획 외의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자체 운영자금을 확보하고 일부는 소속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수공장, 수출기업소, 주요 기간산업의 공장ㆍ기업소 등을 제외하고는 공장ㆍ기업소 차원에서 해당 근로자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는 없었다.

식량난은 쓰나미처럼 공동체를 휩쓸었다. 집단적 재앙에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선의와 공평으로 묶여진 수령공동체는 구성원을 굶주림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 1994년 여름 ‘위대한 수령’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지역에 따라 식량이 끊긴 시기였다. 수령은 인민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우리 인민들은 멀지 않은 앞날에 이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을 쓰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라 래일의 현실입니다. 착취제도 하에서는 이것이 꿈같은 일이지만 우리 제도 하에서는 눈앞에 내다보이는 현실입니다. 기와집도 보이고 욱실거리는 돼지떼도 보이고 과일이 주렁진 과수원도 보입니다.
김일성, “농업협동조합을 정치경제적으로 강화할데 대하여”(1957.12.20)

【그림 4-1】 배급 중단 후 북한 주민들의 생존 방식(총472명)
※ 출처 : 자료: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 (1998). “식량난민 472명이 증언한 북한식량난 실태보고”, 임수호, “최근 북한의 식량사정과 시사점”, SERI Issue Paper, 2009.9.29, p.11에서 재인용.

주민들은 한 줌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귀중품을 팔기 시작했다. 점점 살림살이가 줄어들었다. 옷장을 팔고 이불을 팔았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산에 올라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겼다. 배급은 재개되지 않았다. 살아서 만나기를 소망하는 가족들은 흩어져 유랑에 나섰다. 꽃제비(집 없이 떠돌면서 구걸하거나 도둑질하는 유랑자. 러시아어 ‘코체비예’에서 유래)가 도시의 하수구와 시장 어귀에 모여들었다.

여건이 되는 주민들은 텃밭과 뙈기밭 등 합법, 비합법, 불법의 모든 토지를 사적으로 개간했다. 경작 작물 역시 이제까지는 사적으로 재배가 금지되었던 옥수수 등의 배급 곡물에 집중되었다. 당국의 묵인 아래 사적인 토지개간 행위는 비단 농업협동조합 조합원뿐만 아니라 도시의 산업부문 종사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1990년대 중반, 당국은 농업 부문에서 식량생산 증대를 목표로 새로운 협동농장 관리 제도를 도입하였다. 기존의 협동농장 관리 제도를 대체한 신(新)분조관리제였다. 새로운 제도는 국가 생산목표를 초과한 생산분에 대해서 농장원들의 처분권을 인정한 것이다. 일대 위기를 맞은 북한은 1952년 이후 유지해왔던 독점적 곡물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1997년부터는 기존의 주체농법을 재해석했다. 쌀과 옥수수 위주의 농업생산을 감자나 보리, 콩 등 기타 작물에 대한 생산으로 다변화시킨 것이다. 각 협동농장의 작물선택권을 협동농장에 일부 이양하는 조치도 실시되었다.

사적 경작행위를 할 수 없는 도시 가구들은 시장을 통해 곡물을 구입해야 했다. 시장은 북한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 확보 경로가 되었다. 시장이 주민들의 식량 확보 채널로 등장하면서 경제행위는 변모된다. 시장에서 곡물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화폐가 필요했다. 그런데 시장 곡물 가격은 국정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공식적인 임금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화폐적 소득이 절박하게 되었다. 그들은 화폐를 얻기 위해 장사에 매달렸다.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전달되는 경로가 배급이 아닌 시장이 되자 화폐 수요는 크게 증가하였다. 화폐는 가장 중요한 생존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계획경제가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되자 주민들은 시장에 기대었고, 시장은 다시 계획경제를 약화시켰다. 수령의 선물인 식량 배급이 중단되어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한, 지긋지긋한 장마당의 고함소리와 돈을 향한 탐욕은 그칠 수 없게 되었다. 화폐는 매일매일 필요한 양식이 되었고, 화폐유통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림 4-2】 1990년대 전후 북한 주민들의 식량확보 루트 비교
※ 출처 : 임수호, “최근 북한의 식량사정과 시사점”, SERI Issue Paper, 2009.9.29, p.13.

4. ‘고난의 행군’이 일으킨 변화

고난의 행군은 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개인주의와 기관 본위주의는 두드러진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1990년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제시한 해법은 ‘자력갱생’이었다.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앙양’시킨다는 거창한 국가계획도 있었다. 1998년부터는 ‘선군(先軍)정치를 통한 강성대국(强盛大國) 건설을 발전 전망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레토릭으로는 주민들을 위무할 수 없었다. 주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국가는 무능했다. 주민들은 점점 국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 기댔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경제 위기로 재정이 없는 국가는 기업에게 오히려 성가신 짐이 될 뿐이었다. 오히려 국가는 엄혹한 시기, 주민들에게 마지막 남은 삶의 기회마저도 앗아가려 했다. 1991년의 농민시장 단속과 1998년의 시장규제가 그것이다. 1991년 비사회주의 현상의 확산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농민시장 단속을 강화하면서 그동안 완화했던 농민시장을 모두 10일장으로 환원했다. 장날은 월 3회로 엄격히 제한하고 반입된 물건의 양에 따라 2원 내지 5원의 장세를 징수했다. 그러다 1993년 들어 이 같은 조치를 다시 완화, 매일 장을 재허용했다. 북한은 노동자들의 공장 복귀조치 등을 통해 시장경제의 확산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비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총을 들고 장사행위를 막아도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으며 저항까지 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난 주민은 옛적 그 ‘착한 백성’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이완은 종래 개인적 차원의 암시장을 집단경쟁 매매방식의 반(半)공식적 구조로 바꾸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국가가 독점적으로 거머쥐었던 부(富)는 개인ㆍ기업소 등의 사적 영역으로 불평등하게 이동되었다. 화폐 형태로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은 자신의 화폐가치를 언제든지 현물형태로 실현시킬 수 있는 시장을 원했다. 처음에는 배급제 붕괴로 발생한 식량 확보의 절박함에서 시작한 시장거래는 점차 확대되었다. 중국과의 밀무역, 국가재산의 전유ㆍ약탈ㆍ탈취 등 상품 유입경로도 다양화 되었다. 화폐는 증식되었다. 극한상황에서 성공한 능력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상행위는 다양해지고 규모도 확대되었다. 초라한 ‘등짐장사’에서 지역 간 부족한 물자를 유통시켜 이익을 얻는 ‘되거리 장사’, 철도ㆍ차량을 이용한 도매상인 ‘달리기 장사’ 및 ‘차판 장사’ 등으로 분화되었다. 장마당에서의 소득이 생산단위에서의 노임에 비해 수십, 수백 배에 이르게 되면서 경제생활의 중심은 기업소나 공장이 아니라 장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영기업소나 생산 단위들은 계획지표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은 현실적인 지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활동했다. 현물지표가 아닌 화폐액으로 표현된 금액을 지표로 삼았다. 국영기업소마저도 돈벌이가 된다면, 본래 수행해야할 업무가 아닌 다른 영역에 진입했다. 국가에는 납부금을 내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고, 생산 활동 이라기보다는 영리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화폐거래는 확대되고 시장은 세력을 급속하게 넓혔다.

민영기 /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