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굿즈, 오직 소유하기 위한

     

굿즈에 돈을 쓰라고 충동하는 악마의 속삭임 중 하나는, 그것을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하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안타까움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불안이다. 굿즈 중 상당수는 지금, 혹은 여기가 아니면 다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입 밖으로 내면 유치하거나 후지게 느껴져 속으로만 몰래 좋아하는 문구가 사람마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게는 『마지막 황제』를 쓴 에드워드 베르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 그렇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어쩐지 다양한 사람의 입맛에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귀에 걸고 코에 거는 모습이 목격되곤 하는 말이다.

디자인의 역사에서도 어떤 것들은 중요하게 기록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그늘에 남겨진다(《미스터케이》가 매력적인 유물인 이유는 후자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의 20%를 목전에 두고 세기 초 한국 디자인사에 기록될 만한 것들을 꼽아 본다면, 거기에는 K-pop의 선구적인 앨범 디자인이 포함될 것이 분명하다.

음악 감상의 패권이 디지털 음원으로 넘어가면서, 잠깐 동안 가장 대중적인 소리 저장장치였던 CD는 더 이상 '듣기 위해' 구입해야 할 물건이 아니게 되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 CD 음반이 살아남은 방법은 저장장치로서의 죽음을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었다.

200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비주얼 디렉팅에 힘을 실으며 콘셉트와 세계관 만들기에 돌입한 SM 엔터테인먼트는 이때부터 '덕질하고 싶게 만드는' 전략으로서의 디자인을 인식하고 있었다. 본격화된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우선 CD라면 당연히 담겨 있어야 할 크리스털 케이스를 버렸고, 두꺼운 포토 북을 넣기 시작한 데 이어, 멤버 수대로 다른 표지의 앨범을 내놓았다. 이 일련의 혁신은 앨범 콘셉트와 그룹 아이덴티티에 철저하게 동기화된 수준 높은 디자인을 동반했고, 2014년에는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IF와 레드닷에서 여러 개의 상을 거머쥐는 데 이르렀다.

그 전에도 디자인이 잘 된 앨범아트들은 수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SM의 그 유명한 민희진 디렉터가 이룬 업적은 예쁜 앨범 재킷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앨범의 본질을 아예 바꿔 놓은 것이었다. 음반을 완전히 '굿즈화'한 것이다.

[그림 1] 세계관과 콘셉트 중심의 비주얼 디렉팅 전략은 음반의 본질을 바꾸어 놓았다. ⒸSM Entertainment


“노래는 팝이라면이 맛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음반을 굿즈화한 장본인은 따로 있었으니, 물론 《미스터케이》 이야기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1년 12월, 《미스터케이》는 자이브레코드[1]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팝이라면〉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야심차게 출시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 엔싱크의 〈Pop〉,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More than that〉 등 자이브레코드 소속 가수들의 히트곡 15트랙이 수록된 CD와 함께 미스터케이의 캐릭터 굿즈들이 글자 그대로 라면 봉지 안에 들어 있는 형태의 앨범이었다. 음원 CD 외에도 아이디어 편선지 100개, '빤쯔' 미공개 플래시 애니메이션과 뮤직비디오, 캐릭터 바탕화면과 스크린세이버, '윈앰프' 스킨이 담긴 CD가 함께 들어 있어, 당시 온-오프라인 서비스를 연계하고자 했던 《미스터케이》의 야망도 엿볼 수 있다.

라면 봉지에 담긴 앨범, 그리고 〈팝이라면〉이라는 찰떡같은 타이틀은 패러디의 명가다운 발상이었다. CD에는 꼬불꼬불한 면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스티커는 분말수프 봉지에, 캐릭터 볼펜은 나무젓가락 포장지에 담겼다. 젓가락에는 “노래는 팝이라면이 맛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그림 2] 패러디와 캐릭터라는 《미스터케이》의 주무기를 십분 활용한 〈팝이라면〉은 시대를 한참 앞서간 발상이었다.

같은 시기 《미스터케이》에 등장하던 가수들은 물론, 2년 뒤 데뷔한 동방신기까지도 아직 CD와 카세트테이프를 함께 발매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리버에서 삼각기둥 모양의 mp3 플레이어를 내놓기도, 아이팟이 국내에 상륙하기도 전이었다. 아직은 CD에게 생존을 위한 비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팝이라면〉 광고를 처음 접했을 때는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이것이 도대체 라면인지, 앨범인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생소했다.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다. 《미스터케이》는 음반이 아직 생명력을 잃지도 않았던 때에 그것을 굿즈로 만들어 출시한 것이다. 심지어 굿즈라는 말도 쓰이지 않았고, 굿즈 마케팅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바로 그때. 그것은 분명 전위였다. 비록 ‘달빛에 물들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잊혔지만 말이다.


아마도 '굿즈'가 무엇인지 모르실 여러분을 위하여

원작으로부터 파생되어 특정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각종 상품을 뜻하는 굿즈goods는 ‘오타쿠’ 문화의 한 축으로 이어져왔다. 열광하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그들의 행동 방식은 이제 서브컬처에 머물지 않는다. 굿즈란 기업을 중심으로 출판 시장, 엔터테인먼트 산업, 미술관, 박물관 등 거의 모든 곳에서 빼놓지 않고 생산하는 필수 품목이 됐다. 하나의 대상에서 뻗어 나온 이 파생 상품들은 취향과 디자인이 맞물려 ‘갖고 싶다’는 욕망의 촉수를 건드린다.[2]

치사량을 뛰어넘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지난 5월 발행된 《월간디자인》의 기사는 시중에 통용되는 '굿즈'의 의미와 유통양상을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다. 굿즈 문화는 서브컬처와 아이돌 팬덤에서 발생해 이들이 서식하는 소셜미디어인 트위터에서 자리를 잡았다. 콘텐츠의 원저작자 뿐 아니라 팬, 즉 덕후들이 직접 굿즈를 제작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내 원작 없는 창작 굿즈들도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종다양한 어여쁜 굿즈들은 해당 장르의 팬이 아닌(그러나 덕후 DNA를 가진)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이들이 자기 장르로 돌아가 비슷한 굿즈를 만들고 소비하며 퍼트리면서 해당 아이템의 유행을 만들었다. 그중 몇몇은 대중적인 유행 아이템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굿즈는 장난감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기능이 있는 물건일 수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몇몇 품목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깝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굿즈는 사용가치보다는 소장가치를 가진다. 사실 예쁘고 쓸모없는(혹은 굳이 쓸 필요 없는) 물건들은 21세기 서울 하늘 아래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굿즈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굿즈가 예쁜 제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굿즈는 원본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지만, 원본이 되는 대상을 대리하고 상징한다. 그 대상은 영화나 만화와 같은 비물질적인 취미영역일 수도, 아이돌, 배우, 심지어 정치인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또는 굿즈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자체가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모든 아이돌 팬덤에서 대유행이었던 굿즈는 아이돌을 닮은 작은 봉제 인형이었다. 시작은 보이밴드 EXO 멤버 첸의 홈마[3]가 포토 북 특전으로 주문 제작하여 판매한, 첸을 꼭 닮은 인형 '체니덕'이었다. 치사량을 뛰어넘는 이 인형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공세는 한동안 아이돌 팬덤에 불어닥친 인형 광풍의 티저에 불과했다. 이 바람은 아이돌을 넘어 다양한 덕질 장르를 강타했고, 인형을 위한 옷과 소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문을 열기도 했다.

굿즈의 인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것은 어떤 대상과의 연결을 매개하는 대리물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애착과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굿즈를 수집하는 영화팬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겨냥한 '굿즈 패키지[4]'가 절찬리에 매진되고 있다.
굿즈는 반 정도는 애정의 결과물이지만, 반 정도는 물질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소비와 소유를 통해 자아를 채우려는 현대인의 충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굳이 권위 있는 이름들을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나 멀리 있는 인물이라서, 혹은 비물질적인 '콘텐츠'라서 사랑하는 대상을 직접 소유할 수 없다면, 그와 관련된 물건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시장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정확히 자기가 가진 돈의 액수만큼 자유를 가진다. 무엇이든 살 수 있다. 구입하고자 하는 대상이 인간의 신체나 마약처럼 불법적인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여기에 더해 미디어는 소비를 장려하며, 소셜미디어는 소비의 전시를 권유한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것을 넘어, 무엇이라도 사야 사회생활이 가능할 것만 같은 세상이다.


아주 적은 '자유'로 얻는 정신적 만족

하지만 무엇도 살 수 없다. 그 '자유'의 크기가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경제 주체로 호명되고는 있지만 아직 다 못 갚은 학자금 빚과 턱없이 낮은 임금에 허덕이고 있는 밀레니얼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밀레니얼이 정의당하는 YOLO니 소확행이니 하는 소비 키워드들은 사실 여기에서 비롯된다.

집이나 차 같은 확실한 재화를 살 만큼의 충분한 '자유'가 없을 때 물질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충족할 것인가? 소유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물리적 안정감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물론 집이나 차는 아니더라도, 인간이 저렴한 값에 살 수 있는 재화는 넘쳐난다. 그러나 그 모든 소비재와는 달리 굿즈만이,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대리한다. 말하자면 굿즈는 애정이나 동경과 같은 비물질적 감각을 손에 잡히도록 물질화한 것이다. 아주 적은 '자유'로 이만큼 정신적 만족까지 함께 구입할 수 있는 재화는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굿즈의 본질은 물질적 소유 자체에 있다. 그 이유와 경위를 떠나서, 굿즈를 사는 것은 '갖기 위함'이다. 먹거나, 입거나, 사용하거나, 심지어는 감상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소유 자체를 위해 탄생한 물건인 것이다. 굿즈를 구입하는 행위에는 그것의 용도에 대한 핑계가 없다. 그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소셜미디어에 자랑하거나, 같은 물건을 가진 사람(덕후)들끼리 취향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기능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부수적일 뿐이다.

오직 소유만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말은 곧, 여기에는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구입하는 생필품이라면 얼마든지 대체재를 구할 수 있다. 마트에 갔는데 내가 쓰던 치약이 없다면, 그냥 다른 치약을 사 오면 된다. 그런데 오로지 '저 물건을 가지고 싶다'라는 것이 구입의 목적이라면, 반드시 사야 하는 물건은 아니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굿즈의 세계는 각 굿즈마다의 아주 작은 고유함과 미력한 아우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 3] 금속배지와 엽서를 비롯해 영화의 내용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아이디어의 굿즈들이 영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덕후의 반짝이는 훈장

굿즈에 돈을 쓰라고 충동하는 악마의 속삭임 중 하나는, 그것을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하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안타까움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불안이다. 굿즈 중 상당수는 지금, 혹은 여기가 아니면 다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트위터나 텀블벅의 소규모 창작자들은 대부분 입도선매 방식으로 굿즈를 제작하기 때문에, 주문 기간이 끝나고 나서는 구매하기 어렵다. 개봉 중인 영화의 굿즈 패키지나 콘서트, 공연, 전시회의 굿즈는 그 날 그 장소가 아니면 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굳이 '한정판'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굿즈들이 한정판이나 마찬가지다. 굿즈를 얻기 위해서는 비용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시간성 또는 현장성이 강한 굿즈는 바로 지금 여기를 증거한다. 나의 행적과 경험을 기억하고 증명하는 티켓 북과 마찬가지다. 어떤 굿즈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백전노장의 군복에 빼곡히 달린 훈장 같은 것이 된다. 굿즈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한 장르에서 스테디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금속배지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가슴에 달린 덕후의 반짝이는 표식이다. 비록 그것을 달고 다니기는커녕 비닐 포장 그대로 고이 모셔두는 경우가 더 많지만 말이다.

어쩌면 완전히 소유 자체를 목적으로 구매하는(일단 사고 보는) 물건이기 때문에, 일단 손에 넣고 나면 그것에 대한 불같은 열망은 식고 안심과 뿌듯함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운다. 때문에 진정한 덕후의 면모는 언박싱un-boxing이 아니라 택배 박스를 쌓아둘 때에 발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쇼핑백을 열어보지도 않고 던져 놓을 물건들, 몇 개까지 쌓아 두고 뜯을 작정인지 모를 택배 박스는, 그 상태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최은별 / 디자인문화연구자




[1]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엔싱크,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을 프로듀싱한 그 자이브레코드가 맞다. 자이브레코드는 2000년 7월, 소속 가수들의 한국 내 인기에 힘입어 한국 지사를 설립하고 직접 시장 공략에 뛰어들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아론 카터 등이 내한하면서 《미스터케이》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 것으로 보아, 10대 청소년에게 인기가 높은 《미스터케이》와 자이브레코드가 서로 협력관계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 유다미, 「취급주의, 굿즈라는 이름의 욕망」, 《월간디자인》, 디자인하우스, 2019.05, p.84 
[3] 일명 '대포카메라'를 들고 아이돌 스케줄을 섭렵하며 높은 퀄리티의 사진을 찍는 팬으로, '홈페이지 마스터'의 줄임말이다. 홈페이지를 운영하지 않고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대포 팬들 또한 '홈마'로 통칭된다. 직접 찍은 사진을 모아 포토 북과 같은 굿즈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하며, 지하철 광고나 생일 선물 전달 등을 통해 주도적으로 아이돌을 서포트한다. 
[4] 특정 회차에 영화를 관람하면 해당 영화의 굿즈를 증정하는 패키지 상품. 보통 16,000~15,000원 선에서 가격이 형성되며, 대부분 할인혜택을 적용할 수 없고 당일 예매취소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동진의 라이브톡'만큼이나 인기가 많다. 주로 금속배지와 포스터 등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