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프라임 사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이들은 상위 20%의 프라임 사회 안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 놓고 있으면 다시 20% 밖으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20%밖으로 밀려나면 사회 안전망도 없은 상황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80% 서브 프라임 사회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1퍼센트, 0.1퍼센트의 탓으로 떠넘기기

일부에서는 현재 한국사회의 핵심 단층선이 세대냐 계급이냐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식의 과거 사고 틀로는 제대로 사안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 같다. 굳이 그 개념들로 접근하면 둘 다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여기서는 굳이 따지면 계급문제, 좀 더 포괄적으로는 약 20퍼센트 정도의 중상류층이 완고하게 쥐고 있는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또 다른 단층선에 초점을 모아보고 싶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불평등에 관한 첫 번째 이슈는 상위 1%가 문제냐, 상위 10%가 문제냐는 식의 논쟁이었다. 하지만 월가 점령운동 영향으로 2011년 이후 1:99의 구도가 계급 전쟁의 새로운 틀로 부상했고 피케티의 장기소득분포 분석은 여기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일부 특권 재벌집단에 저항하는 경제 민주화 운동 프레임으로 해석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인식했다. 최상위 계층으로부터 부의 재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정책 경쟁을 하고, 최하위 계층의 바닥을 올리는 정책을 함께 고민해왔다. 이른바 “위를 깎고 바닥을 올리고 가운데를 튼튼히 하는 전략”이었다.(척 콜린스의 『세계는 왜 불평등한가』) 하지만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가가 “현재 사회 문제는 ‘좌와 우’가 아니라 ‘위와 아래’의 문제”라고 해서 유명해졌던 얘기의 진정한 스토리는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20% 안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프랙털 격차 추격전

사실 1:99 구도에는 직관적으로도 상당한 허점이 있었다. 상위 1%, 또는 0.1%는 일반 시민들이 대체로 접근 자체가 안 되는, 너무 먼 사회적 거리에 있는 부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는 사회적 거리에서도 특권과 신분적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제대로 인식 못 하거나 또는 대부분 식자들이거나 전문가들인 당사자들이 그 안에 있어서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대목에서 새로운 통찰을 안겨준 리처드 리브스는 『꿈 사재기(Dream Hoarders)』라는 책(한국어 번역 제목은 『20 VS 80의 사회』)에서 상위 1%와 별개로 중상류층 20% 프라임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의 속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조국 후보 인사검증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눈과 귀로 목도했던 것은, 1%의 사회적 거리가 아니라 바로 20%에 대한 사회적 거리였을 것이다.


리브스 보다 조금 더 전에 크리스토퍼 헤이즈는 20:80의 사회적 단층선을 전제하고, 다시 그 20% 프라임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격차의 분할과 그 격차를 넘어 위로 올라가려는 피 터지는 경쟁을 ‘프랙털 빈부격차’라고 『똑똑함의 숭배(원제 Twilight of the Elites)』라는 책에서 적절히 표현한다. 즉,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동일한 무늬가 반복되는 프랙털처럼, 20 대 80의 격차는 5대 95의 격차, 1 대 99의 격차, 0.1대 99.9의 격차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분배 구조는 필연적으로 그곳에 오르려는 야심가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킨다. 기대 이상의 목표를 성취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서 오는 특혜를 누리지만, 그 기쁨은 닿을 수 없는 더 높은 특혜와 권력, 지위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는 이런 전형적인 사례를 매년 1월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부자들의 포럼인 다보스 포럼에서 목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다보스 포럼에 초청된 다수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세계적인 지도자들의 성소에 절대 초대받지 못할 불쌍한 사람들과 격이 다른 특별한 인물로 생각했는데, 다른 계층의 참석자들과 비교하자마자 우리가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가는 하층민처럼 느껴진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들은 공항에 닿아서 셔틀버스를 타고 포럼장에 가고 있는데, 똑같은 비행기를 탔지만 일등석에 앉아서 왔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경호부대가 재빨리 와서 벤츠에 태워 모셔가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개인 제트기를 타고 와서 헬리콥터로 갈아탄 뒤 알프스 풍경을 감상하면서 호텔에 도착하고 있었다.

물론 “다보스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 서브 프라임 사회 구성원 말고, 20% 프라임 사회 구성원들로서 다보스에 참석한 이들도, 그 내부에 다시 반복되는 빈부 격차에 압박감을 느끼며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 단계씩 성공하는 사람들은 시샘할 만한 더 높은 단계의 지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고, 이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쟁탈전에 추진력이 된다.” “프랙털형 빈부격차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올라야 할 더 높은 지위, 이겨야 할 더 치열한 경쟁, 벌어야 할 더 많은 돈만 있을 뿐이다.”


그들의 유리 바닥은 하위 80%의 유리 천정이 되고

이런 식으로 “상승 계단이 까마득하게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이미 상위 20%안에 여전히 안주하고 있거나, 그것을 넘어 그 위의 10%, 5%, 1%로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이뤄냈다고 믿는 것”이다. “3루에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아는” 이들은 그래서 생긴다고 한다.

더욱이 이들은 상위 20%의 프라임 사회 안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 놓고 있으면 다시 20% 밖으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20%밖으로 밀려나면 사회 안전망도 없은 상황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80% 서브 프라임 사회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 프라임 사회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아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리처드 리브스가 얘기한 20%의 ‘유리 바닥 깔기’다. 그들의 유리 바닥은 하위 80%의 유리 천정이 되고, 그 결과 이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체로 20% 프라임 사회 사람들은 ‘개별적으로는’ 최소한 20% 밖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보유한 특권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자신의 위에 있는 5%, 1%, 0.1%를 비난하며 현재의 사회 탓이 그들 때문이라고 몰아 부친다. 그러는 동안 누구에 의해서도 프라임 사회와 서브 프라임 사회의 장벽을 부수려는 어떤 시도도 이뤄지지 않는다. 수많은 민주화 요구, 개혁과 복지, 혁신에 대한 요구들과 정책들은 겨우 상위 1% 이상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하위 20% 정도의 처지를 다소 개선하는데 바쳐질 뿐이다. 그리고 20% 프라임 사회와 80% 서브 프라임 사회에 가로 놓인 장벽 해체와는 무관한 논의들과 시도들, 입법들이 여당과 야당 사이에 교환될 뿐이다.

프랙털 디자인 사례 : 동일 무늬가 무한 반복된다.

최근 조국 장관 가정을 포함한 유력 인사의 자녀들이 학교 과정에서 동원한 경제적, 지적, 인맥 자원의 조밀함과 특별함에 우리들이 새삼스레 놀란 것은, 그들이 상위 20%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20%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가 문제일까 불법적이지만 않다면. 그리고 당사자들이 합법적인 규칙에 따라 능력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노력했는데? 헤이즈가 덧붙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공정에 대해서, 능력주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한다.

“능력 있는 엘리트가 되려면 똑똑함은 필수 덕목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혜와 판단력, 공감 능력, 윤리적인 엄격함도 똑같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특성들은 거의 대접받지 못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사회에 대한 그동안의 내 사고 프레임을 다시 성찰해본 결과이다. 내가 배운 과거의 계급이나 세대 프레임으로는 부분적으로 밖에 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나의 배움이 짧아서 일수도 있지만.

김병권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