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함의 마지막 보루, 능력주의의 사망

     

그나마 통했던 능력주의 기제가 언제부턴가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상속주의가 이를 대신해왔고,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세습자본주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민주와 평등’의 가치를 옹호했던 개혁 진보 세력의 많은 이들은 이것을 인지하지도 막지도 못했던 게 아닐까? 뒤늦게 온정주의적 청년지원 정책 몇 가지를 내놓거나 교육개혁안 짠다고 소란이지만, 그런 수준으로는 이미 사회를 지배해버린 상속과 세습의 위세를 막기에 늦은 것은 아닐까?

어느 부모 아래 태어났나? 어느 시기에 태어났나?

최근까지 내게 강하게 잔존해 있었던 두 가지 암묵적 전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 어느 정도 받쳐주면 그래도 능력주의가 공정한 시스템”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교육개혁이 기회의 평등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 조국 장관 인사 검증 논란 과정에서 이 두 개의 전제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이 두 가지 전제를 암묵적으로 믿고 있었던 내 생각이 착각이라면 한국 사회를 보는 정말 많은 관점들의 토대가 다 무너지게 되지 않을까?

왜 이런 의심이 들었을까?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번에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첫째,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가? 상위 20%부모에게 태어났는가 아니면 하위 80%부모에게 태어났는가? 둘째는, 어느 시점에서 태어났는가? 1960년대에 태어나 경제가 번성하던 80년대에 사회로 진출했는가 아니면 1980~1990년대에 태어나 저성장과 고용불안이 일상화되던 때에 사회로 나왔는가?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어느 시점에 태어나는가는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처럼 외부에서 발생하는 운 때문에 그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인생과 미래가 결정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미 능력주의가 파산했음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이미 “상속주의가 능력주의를 추월해 버렸다”고.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그나마 통했던 능력주의 기제가 언제부턴가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상속주의가 이를 대신해왔고,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세습자본주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민주와 평등’의 가치를 옹호했던 개혁 진보 세력의 많은 이들은 이것을 인지하지도 막지도 못했던 게 아닐까? 뒤늦게 온정주의적 청년지원 정책 몇 가지를 내놓거나 교육개혁안 짠다고 소란이지만, 그런 수준으로는 이미 사회를 지배해버린 상속과 세습의 위세를 막기에 늦은 것은 아닐까? 고백하면 나도 꽤 능력주의 가치관을 믿었던 것 같고, 어쩌면 그 때문에 최근까지 기득권 카르텔이나 불평등 대물림의 전체 모습을 충분히 통찰하지 못했다.


능력주의(meritocracy) : 희망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날 운명

사실 차별과 불평등의 만연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공정성을 마지막으로 지탱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바로 능력주의다. 각자는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합당한 성과를 받을 수 있도록 동일한 기회를 주자는 것이 능력주의다. ‘노력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원칙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다수에게 지지받아왔던 얼마 안 되는 원칙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능력주의가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를 토대로 했던 수많은 ‘공정성’ 주장도 모두 허구가 되고 만다.

이론적으로 완전한 능력주의라면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능력만이 중시되면 부모는 자녀에게 그 어떤 특혜도 물려줄 수 없다. 가령 부모는 자신의 개인 재산을 동원해 자녀를 유명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개인 과외교사를 고용하거나,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해 힘겨워하는 자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런 사회라면 부모는 자녀에게 유산을 남길 수도 없으며, 다른 아동들에게도 똑같이 제공될 수 없다면 그 어떤 자원도 자녀에게 줄 수 없다”(『능력주의는 허구다』, p332). 하지만 ‘국영 고아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런 사회는 물론 불가능하므로 이상적인 능력주의 자체가 원래 허구라는 점을 먼저 확인해두자.

이상적 능력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보다 개인적으로 볼 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능력주의로 시작해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느새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던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로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능력주의를 매우 공정한 시스템으로 여기지만, 오로지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는 위계질서가 잡히면서 엘리트들은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억압하고 탄압하고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등 점차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지배되는 무자비한 사회로 변질”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판을 다시 흔들지 않는 한 능력주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회도 처음에는 순수한 능력주의, 즉 순전히 본인이 가진 잠재 역량과 성실한 노력에 따라 인생의 미래가 결정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 다른 외적 조건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처음에는 완전한 자유경쟁에 의해 시장경제가 시작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에 패한 기업이 몰락하고 이긴 기업이 덩치를 키워 독점이 생기고, 이들이 독점 가격을 설정하고 진입 장벽을 세워 더 이상 신생 기업들이 자랄 수 없도록 시장을 장악해버리는 것처럼.

사회학자들은 이를 ‘마태복음 효과’(“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얻고 한층 더 커다란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갖지 못한 자는 이미 갖고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라는 마태복음 구절에 비유)라고 한다. 처음에 자유 경쟁이 나중에 독점과 경쟁 배제로 귀결되는 것처럼, 능력주의는 내버려 두면 조만간 상속주의/세습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만약 능력주의를 어느 정도라도 작동하게 만들려면, 국가가 지속적으로 이탈을 막기 위한 제도적 교정과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시장 실패를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도 1953년 토지 개혁과 1970년대 고교 평준화, 1980년대 사교육 금지처럼 다소 파괴적인 조치들이 없었다면 그나마 능력주의는 아주 오래 전에 고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작동을 했던 능력주의 우세 경향은 2020년대를 앞둔 한국 사회에서 확실하게 상속주의/세습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 게임의 판을 다시 흔들어 시작하지 않는 한.


지금 작동하는 규칙은 ‘세대 간 릴레이(relay) 경주’

그러면 이제 능력주의를 매장한 자리에 들어선 상속주의/세습주의 한국 사회에서, 상위 20% 프라임 사회에 속한 부모를 둔 자녀들의 인생 경로는 어떻게 펼쳐질지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하나 인용해보자. 그 자녀들은, “유년기에 수준 높은 생활을 누리고, 별다른 노력 없이 문화적 자본에 접근하고,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네트워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부모의 재산을 활용할 수 있고, 부모로부터 건강한 신체를 물려받고, 기대 수명이 길고, 삶의 고비 때마다 부모가 구출해주고, 부모가 사망할 시 방대한 규모의 재산을 상속받는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야말로 노력 없이 갖게 되는 특권이다.”(『능력주의는 허구다』, 153p) 딱 지금 한국 사회가 그렇지 아니한가?

결국 “세대가 바뀔 때마다 판을 짜서 새로운 출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부모로부터 출발점을 물려받는 <릴레이 경주relay race>에 가깝다.” “세대 간 릴레이 경주에서 부유한 부모를 둔 사람들은 처음부터 결승점에서 혹은 결승점 근처에서 출발하는 반면, 가난한 부모를 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뒤에서 출발한다. 애초에 결승점 가까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경주에서 한 칸 더 앞으로 가기 위해서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좀 더 밝은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 이 때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자녀 세대에게 특권을 넘겨주려는 부모의 ‘의지’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능력’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가능한 한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을 물려줌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성공하게끔 이끌어주고 싶어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온갖 특권을 성공적으로 물려줄수록 자녀들의 삶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상속에 의해 결정된다.”

이 대목에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현실이 이렇게 끔찍이 상속에 의해 결정된 사회로 이미 전환된지 오래인데, 왜 우리는 능력주의가 아직도 작동한다고 착각하고 여전히 열렬히 옹호해 왔을까? 내가 보기에는 특히 그런 착각은 20% 프라임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기만일 개연성이 높다. 아래 인용문이 그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성공한 상류층들에게 “자신이 일생동안 이뤄낸 성과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자 대부분의 인터뷰 참가자들은 자신의 재능과 근면, 끈기를 언급했다. 안전하고 경제적 자원이 풍부한 동네에 거주할 수 있었던 부모의 배경, 우수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여건, 폭넓은 사회적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덕에 받게 된 혜택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지의 장막’에서 어떤 선택이 ‘공정’할 것인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상속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사회로 변질되어 버린 것을 깨닫게 된 지금,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에 누가 믿음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러면 능력주의가 사실상 사라진 상황에서 정의와 공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잠시 확인해보고 싶다.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운이 끼어든다고 해도 어느 정도 공정한 사회를 설계하기 위해, 철학자 존 롤스가 동원한 개념이 바로 ‘무지의 장막’이다. 그는 내가 세상에 어떤 환경(예를 들어 부잣집에 태어날지 가난한 집에 태어날지, 남자로 태어날지 여자로 태어날지 등)으로 세상에 태어날지 알 수 없는 무지의 장막 속에 있다고 가정하고, 운이 나빠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날 것까지를 감안해서 선택하는 사회 제도라면 공정할 수 있다고 예상한 것 같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기본재가 제공되는 사회 제도는 그 사례일 것이다.

존 롤스의 기초적인 논리를 따라가서, 만약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어느 부모 밑에서 어느 시대에 태어날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공정한 사회를 설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가난한 집 자녀로 태어나도 사회의 기본권을 박탈당하지 말아야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고 임시직이 넘쳐나는 시점에 태어나도 먹고살 궁리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공정한 사회, 공정한 게임의 최소 조건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세대를 막론하고 공정을 요구하는 경우란 그저 ‘불법적 특혜’ 수준에서 국한되고 있다.

또한 존 롤스의 가정을 확장한다면, ‘단 한 번의 시험’(대입 시험이든, 행정이나 사법 고시든) 통과로 영원히 특권적이고 안정적인 소득이나 지위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것이 아닐까? 무지의 장막에서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페이퍼 시험으로 충분히 드러내는데 약한 사람으로, 또는 알바 뛰면서 겨우 시험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아니면 다른 불운이 겹쳐 시험의 때를 놓친 사람으로 태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시험’에 나 자신의 차별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국의 최우수 명문 헌터 중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18세의 한 졸업생은 이렇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일단 합격하면 이후 장래가 보장되는 헌터 중고등학교는 오직 한 가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입학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세 시간 동안 치르는 단 한 번의 시험이란다.)

“우리가 무료로 우수한 교육을 받은 것은 우리가 네 살 때, 혹은 열한 살 때 치른 시험 성적, 오직 그 한 가지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인재’라는 지위를 부여받아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그 외에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지원이 우리보다 훨씬 더 절실한 다른 친구들은 그동안 엉망진창이 된 사회 체제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순전히 운과 환경 덕분에 우리가 원하던 삶을 살아온 우리는 지금 인생의 절정에 있습니다.”(『똑똑함의 숭배』 p62)

공채로 정규직이 된 이들이, 자신의 직장에서 차별받으며 오래도록 일해 온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려는 순간에, ‘공채’를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될 수 없다면서 ‘공정’을 외치는 것이 위의 18세 졸업생 소년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그 ‘공채’시험은 어떤 이유로도 ‘영원한 특혜의 정규직 보증서’가 될 수 없다. 정규직은 시험과 무관하게 기초적인 노동권이다. ‘공채’시험이 준 자격은 기껏해야 해당 직무에 대한 능력을 잠시 인정해 준 것일 뿐이다. 이렇게 능력주의가 사라진 사회에서 ‘공정함’에 대한 기준은 처음부터 다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병권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