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능력주의 엔진’에서 ‘세습의 보증서’로

     

자사고 특목고에 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재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얘기나 SKY 명문대학 재학생들의 상당수는 소득기준 상위 20%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그동안 꽤 회자되어 왔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끈질긴 기대와 미련은 한국 교육의 성격이 뿌리에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못 하도록 막았는지도 모른다.

모두 같은 층에 탄 뒤, 노력과 성취에 맞는 층에 내리는 엘리베이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미련에서 최근까지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착각(?), “교육제도를 잘 개혁하면 기회의 평등이 얼마간이라도 실현되지 않을까”하는 질긴 믿음에 대해 최근에 역시 의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좋은 시절에 태어나지도 못했더라도,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능력을 쌓을 동일한 기회를 얻고, 이를 통해 사회에 진입하면 되지 않을까? ‘공평한 교육 기회’가 불운을 어느 정도 완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해방 이후 오랫동안, 그나마 ‘교육’이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에게 기대해볼 유일한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어느 정도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니, 기성세대들의 교육에 대한 애착이 뿌리 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더욱이 한국은 ‘자원’이 없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인적 자원’에 투자해야한다는 얘기가 잊을만하면 반복된 경제 발전 스토리이기도 했고 지금도 녹슬지 않고 ‘인적 자원’ 찬양은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 현실은 사람들의 생각과 정 반대로 변해온 것이 아닐까? 교육은 타고난 불운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불운에 확실한 도장을 찍어주고 있지는 않을까?

교육이 능력주의 엔진일 수 있다는 오랜 믿음은 학교를 엘리베이터에 비유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고 한다. 학교는 “모두가 같은 층에서 타지만, 학교에서 각자 얼마나 노력해서 학업 성취를 했느냐에 따라서 특정 수준의 직업과 소득에 상응하는 각기 다른 층에서 내리는 ‘엘리베이터’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정 출신이지만 능력 있고 근면 성실한 아이들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자신들이 누려온 특혜를 유지하려면 학교에서 최소한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것을 요구한다.”(『능력주의는 허구다』, p50) 따라서 교육 성취를 기준으로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다르게 주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기회의 사다리에서 신분 고착의 ‘잔인한 매개체’로

사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익히 인식하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교육이 기대한 것만큼 잘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개탄일 뿐, 교육이 기대한 것과 정반대의 역효과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었다. 과도한 사교육 억제라든지, 지나치게 서열화된 대학 구조 개혁이라든지, 학벌에 집착하는 문화의 개혁 등을 통해서 불평등을 완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위 소득 이하에 대한 등록금 보조나 대출 이자 지원 등이 기회의 평등에 기여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은 결단코 능력주의의 엔진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불평등한 출발점>을 재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의 기초적인 구성 요소일 뿐”이라는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학교와 교육은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의 불평등을 반영하고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시켜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불평등한 삶을 대물림하는 데 일조하는 잔인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특히 “교육은 가장 자격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상향적인 사회적 이동성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지 못한다. 대신 특정한 학력 자격증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이동성을 차단하는 인위적인 걸림돌이 된다.”

한발 더 나아가, 물리적 자산의 증여와 상속을 능가하는 세습 효과를 발휘할 가장 유력한 신분고착화 기제가 ‘교육’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즉, “교육은 다음 세대로 특권을 넘겨주는 주된 형태로서 유형 자산을 대신”하게 되는데, 그 결과 “부모 세대가 쌓아놓은 사회적 인맥, 상류층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자원, 직업 기회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우수한 교육 등은 재산 상속 못지않게 자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특권으로 물려주는 상속의 한 유형”이 되었다는 것이다(『능력주의는 허구다』, p142).


20% 프라임 사회의 재생산은 혈통 대신 학교에서

사실 잊고 있던 사실이 있는데, 서구에서 학교와 교육 제도는 18~19세기를 거쳐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대량의 일자리에 적합한 단순 노동, 사무직 노동, 경영 관리 스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편에서는 상층 엘리트 집단의 폐쇄적 정체성을 재생산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한국에서는 이 대목이 역사적으로 두드러져 있지 않은 탓으로 충분히 인지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일부 중〮고등학교나 상위권 대학들에서 특권을 재생산하는 기능이 작동하고 있다.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는 이미 1956년 그의 책 『파워 엘리트』에서 교육은 대중교육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엘리트 기득권 집단의 횡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상류층의 전통을 전달하고 새로 부와 재능을 갖춘 사람들의 편입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류층의 가문이 아니라 학교”라면서 혈통 대신 학교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혈통에 근거한 신분의 주장을 현실로 실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에 따라, 사회적 중요성에 있어서 명문 학교가 가문의 혈통을 능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오늘날 미국 상류층의 통합 요소를 밝히는 열쇠를 찾기를 원한다면, 그 열쇠는 소녀들의 기숙 학교와 소년들의 사립 고등학교가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과 그저 부유하기만 한 사람을 구분하는 깊은 경험 하나가 바로 그 사람의 학교 교육이다. 이 교육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모든 인연과 감각과 감수성이 그들의 삶 내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원래부터 학교가 가지고 있었던 양면성 중에서 ‘기회의 사다리가 되어줄 대중교육’이라는 측면은 점점 약화된 반면에, ‘혈통을 대신해 기득권 엘리트를 공고히 만들어주는 매개체’의 측면이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에서도 서서히 전면에 부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사고 특목고에 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재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얘기나 SKY 명문대학 재학생들의 상당수는 소득기준 상위 20%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그동안 꽤 회자되어 왔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끈질긴 기대와 미련은 한국 교육의 성격이 뿌리에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못 하도록 막았는지도 모른다.


‘악성 학력 인플레이션’의 비극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시민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나, 이번 조국 장관 인사 검증 대목 중에 유난히 자녀교육 관련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던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완전하게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서 ‘신분 고착의 만리장성’으로 전환되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비극의 끝판왕은 다른 곳에 있다. 여전히 교육을 능력주의의 엔진으로 오인하여 지금도 무한한 과잉 교육 투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말이다. 청년들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기업들은 필요한 자격 요건 이상의 학위를 관례적으로 요구하고 그에 미달하면 채용하지 않거나 채용하더라도 임금 삭감의 빌미로 삼는다. 그 때문에 실제로 취업해서 활용하지도 않을 학력을 쌓느라 청년들이 비용과 노력을 더 들이게 되고 그럴수록 기업은 더 높은 요구를 하게 되는 ‘악성 학력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는 것이다.

25~34세 연령대에서 대학졸업 이상 학력을 지닌 비중

이는 한국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 발표된 OECD의 에 따르면, 25~34세 인구의 대졸자 비율은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OECD 평균이 44%인데 한국은 무려 70%였고 지난 10년 동안에도 12%나 증가했다. 두 번째를 달리는 일본 61%에 비교해도 엄청난 차이이며, 미국 49%, 스웨덴 48%와는 비교조차 무안할 수준이다. 이 수자만 보면, 학력 측면에서 한국의 청년 노동력은 세계 최고이며 더 이상 교육에 투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초과잉 학력 인플레이션 상태다. 초과잉 투자 상태라는 말이다.


학교 개혁에 앞서 입구와 출구를 완전히 다르게

이처럼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서 최악의 신분 고착 도구로 변한 한국의 교육 제도 속에서, 단념하지 않고 무리한 비용을 들여 최악의 과잉 학력인플레이션을 악순환시키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블라인드 채용’ 확대 같은 소극적인 개혁으로는 어림도 없으리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전 하버드대학교 총장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는 “민주주의는 각 세대가 끝날 무렵, 권력과 특권이 자동적으로 다시 분배되는 지속적인 과정을 요구”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다. 교육 제도 개혁 이전에 학교 문 앞에 서 있는 학생들의 출발점을 같게 만들기 위한 대개혁이 필요하다. 또한 사회를 향해 학교 문밖으로 나가는 졸업생들 앞에 놓인 노동시장의 대 평탄화를 위한 대개혁을 준비해야 한다. 대부분은 학교 자체 재설계로는 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한국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꽤 평등한 사회였다고 알려졌다. 그 배경에는 1950년대의 대대적인 토지 개혁, 1970년대의 학교 평준화 조치, 1980년대의 사교육 금지와 같은 파격적인 일련의 제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외환 위기 이후에는 “권력과 특권이 자동적으로 다시 분배되는 지속적인 과정”이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다. 그 결과가 지금 목도하는 신분 고착 도구로서의 한국 교육이 아닐까? 출발선을 비슷하게 맞추고, 목표 지점들의 격차를 대폭 압착시키는 개혁은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 수준만으로는 안 될 것이다.

김병권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