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값을 매기면 똥이 된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가장 소중하고 가장 필요한 것들에 똥값을 매겨서 실제로 ‘똥’보다 천한 것으로 박대하는 이 관행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소중한 것들에 소중한 값을 매겨야 한다.

중요한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중요성과 의미를 이해하려면 큰 사상가 두 사람의 생각을 짧게 소개해야 할 것이다.

우선 20세기 후반 아나키즘 운동을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라는 이름과 결합해 부흥시킨 머레이 북친(Murray Boockchin)의 생각으로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술적 공학적 해법은 생태 위기에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위기의 근본 원인이 소수의 인간이 대다수 인간을 지배하는 촘촘한 위계제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제반 불평등에 있으니, 이러한 사회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 모든 이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지 않는 한, 생태 위기는 해결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분명 심정적으로 동감도 가고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귀한 생각과 사상을 담은 말인지라 동의하지 않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판적, 분석적으로 따져보면 그다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에 대한 지배가 꼭 자연에 대한 지배로 이어지라는 법이 있는가? 그리고 사람에 대한 지배를 수반하지 않고도 인간 집단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일도 많지 않은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좀 더 세련된 논리는 없는가? 물론 풍부한 사상가이자 활동가였던 북친은 이러한 물음들에 답이 될 만한 여러 저작과 실천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과연 경제학, 영어 숙어대로 ‘돈 계산의 논리로(dollars and cents)’ 작동하게 되어 있는 경제학의 논리로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두 번째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의 중요성과 위대성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북친보다 한 세기 전 사람인 마르크스는 생태 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북친의 생각을 예견한 혜안과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자본이 노동 과정에서 뽑아내는 잉여가치에 기초한다. 비록 《자본론》 1권에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과정이 오직 노동자의 노동 시간, 노동 강도, 생활 수준으로만 설명되었지만, 그가 1860년대 초중반에 작성한 경제학 노트에는 그보다 훨씬 포괄적으로 자본의 잉여가치 산출 과정 개념이 제시되었다. 막상 생산이 실제로 벌어지는 과정 안으로 들어가면 그저 인간과 기계와 재료가 서로 부닥치는 기술적 과정으로 보일 뿐, 자본이라는 것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기술적 과정으로서 생산이 자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 즉 ‘포섭(subsump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려고 한다.

포섭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존재하는 생산과정을 자본이 통째로 내부화하는 ‘형식적 포섭’이다. 예를 들어 어느 식민지에 목화를 생산하는 큰 농장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농장 내부는 오래전부터 지주와 소작농, 농노 같은 전통적 관계로 조절되어왔다고 하자. 자본가는 농장주에게 접근해 이 농장에서 생산한 목화를 매년 얼마의 가격으로 사들이겠다고 제시한다. 전통 사회에서 농장과 인근 주민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생산되던 목화는 이제 상품으로 변하며, 지주는 이제 장부를 들고 다니며 돈 계산을 하면서 소작농과 농노를 악착같이 쥐어짜는 존재가 된다. 이상 김해경의 시구절인 ‘예수는 드디어 감람산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 아-르 카보네는 감람산을 山채로 납치하였다’가 연상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사회 관계망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산 과정을 통째로 자본의 지배 아래에 두는 것이다.

그 뒤로 이 전통적인 사회 관계는 서서히 혹은 급속히 해체된다. 소작농과 농노는 무산자 계급으로 변하며, 지주는 몰락하거나 자본주의적 경영가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되면 ‘내용적 포섭’ 단계로 넘어간다. 자본의 지배는 농장 전체를 한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속살로 속속들이 파고들어 생산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고, 장비 하나하나를 장부의 유형자산으로 만들고…. 결국 생산 관계 전체가 자본이 이윤을 확대하는 과정에 최적이 되도록 바뀌어간다.

이 ‘포섭’ 개념이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의도를 훌륭하게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에서의 ‘평화롭고도 평등한 교환을 통해 모두가 부유해지고 만족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환상을 근본적으로 깨고자 했다. 포섭이라는 개념은 태초에 ‘시장과 교환과 상품이 있었고, 그래서 만사만물은 내재적 가치(intrinsick value)를 자연적으로 가진다’라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마르크스의 표현으로는 ‘속류 경제학자들’)의 비현실적, 비역사적 환상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자연과 사회와 인간은 존재하였고, 그들이 만들어내고 살아가는 세상이 존재하였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멀쩡하게 굴러가던 세상에 개입하여 온갖 폭력과 압박과 속임수를 써서 상품 관계로 포섭하면서 생겨났다. ‘평등하고 평화롭고 공평한 시장’이란 애초부터 환상이었을 뿐, 힘이 우월한 자들이 겁박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이 본의 아니게 자본의 관계에 휘말리면서 시장과 교환과 상품이 나타나게 된다는 게 포섭이라는 개념의 함의다.

여기에서 착목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교환되는 상품들은 과연 그 ‘내재적 가치’에 따라 등가교환되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철저하게 상품들의 등가교환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 듯 보이지만, 사실 1850년대 말에 작성한 노트인 <강요Grundrisse>에서도 그렇고 특히 이 ‘포섭’ 개념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 점은 모호하게 나타난다.

《자본론》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 ‘포섭’에 의해 졸지에 상품으로 변해버린 것들은 그러한 상품 생산의 결과로 나온 생산물이 아닌데 무슨 ‘필요노동시간’이 있을 것이며,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역사적인 데이터로 보나 사회의 현실로 보나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그 ‘포섭’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가치절하를 겪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본론》 1권 끝부분에 나오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른바 ‘절대적 잉여가치(노동 시간 및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한 잉여가치 착취)’도 ‘상대적 잉여가치(임금재의 가치 저하를 통한 잉여가치 폭의 확대)’도 사실은 바로 그러한 폭력과 억압과 계략으로써 노동이라는 생산 자원과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임금재라는 간접적 생산 자원의 가치를 계속 낮추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포섭’ 개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윤이 발생하고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을 이해한다면, 초두에 언급한 머레이 북친의 명제가 상당히 구체성을 가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는 주로 인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로 나타난다. 자본은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는 계속적인 절하를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과정이 혁명적 봉기나 피지배 계층의 정신적, 육체적 고갈에 따른 체제 전체의 파탄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제반의 사회적 과정 그리고 그 너머의 자연적 과정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포섭’을 감행하여 그 가치를 깎고 낮추는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이 세상이 유지되고 굴러가는 데 꼭 필요하고, 가장 기초가 되고, 가장 소중한 것들일수록 어김없이 싸구려로 값이 매겨지고 지천(至賤)이 되어 사방에 굴러다니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시대의 경관(landscape)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라서 다가오지 않는 분이 많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두 사상가의 이론과 개념은 21세기 초입에 들어 미증유의 극심한 불평등과 절체절명의 생태 위기에 맞닥뜨린 인류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실로 핵심이지만, 이해하기에 만만하지 않고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하여 우리의 세상을 떠받드는 가장 소중하고 필수적인 것들이 왜 ‘싸구려’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한지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서술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북친과 마르크스, 두 사상가를 계속 머릿속에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상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어머니도 체력에 한계가 있고, 사람의 배려와 사랑도 바닥이 있고, 자연과 대지가 품을 수 있는 용량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이렇게 싸구려로 만들어 지천으로 사방에 늘어놓는 세상, 그래서 자본과 경제와 권력의 무한한 성장과 팽창을 꿈꾸는 세상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를 넘어서서 자연과 사회와 인간이 화해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막연한 이상과 구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가장 소중하고 가장 필요한 것들에 똥값을 매겨서 실제로 ‘똥’보다 천한 것으로 박대하는 이 관행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소중한 것들에 소중한 값을 매겨야 한다. 노동시간이든 효용 가치든, 무슨 객관적이고 절대적이고 내재적인 가치 따위가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치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함께 생각해 결정하는 것이다.

홍기빈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