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정의’와 ‘공정’의 기준에 합의했을까?, <정의의 아이디어>

     

하지만 아직도 다수가 납득할 만한 방식의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배경 가운데 하나는 유행처럼 번진 정의와 공정에 관한 담론들이 충실하게 토론되지 않고 그 원칙이나 기준들이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채 지나가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의론’ 독서 열풍 10년 그리고…  

올여름 휴가시즌에 권하는 책 7권을 뽑아보았다. 2020년을 앞두고 지난 10년 동안 일어났던 사회변화 키워드를 알려줄 만한 책 가운데 올해 출간되거나 번역된 책들이다. 『일자리의 미래(원저는 The Job)』, 『우버혁명(원저는 Uberland)』, 『블록체인 해설서』, 『AI 마인드(원제는 Architects of Intelligence)』에 이어 이번에는 철학책으로 방향을 돌려보겠다. 생존 학자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도 출신 아마티아 센을 추천한다. 2009년 정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종합한 『정의의 아이디어』를 올해 2019년 번역 출간됐는데 여름휴가 추천 다섯 번째 책으로 정의에 관한 센의 생각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10년이 되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이 한국사회에서 유독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가 하면 심지어 이명박 정부까지 ‘공정사회’를 정책기조로 삼겠다고 표명하던 시기가 10년 전이다. 그 이후 최근까지 한국사회는 특정 사회 이슈가 터질 때마다 공정성 문제나 정의의 관점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는 갈등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되고는 했다. 이를테면 얼마 전 기존 정규직 청년들이 자신들과 달리 공채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정규직 직원이 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면서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에 반발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반대로 최근에는 학교 비정규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무늬만 그럴싸하고 실제로는 차별이 시정된 게 없다면서 거세게 항의했던 사례도 있다.

시야를 넓혀보면, 세계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이 점점 더 어떤 근거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분배 정의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가 납득할 만한 방식의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배경 가운데 하나는 유행처럼 번진 정의와 공정에 관한 담론들이 충실하게 토론되지 않고 그 원칙이나 기준들이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채 지나가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정의에 관한 이론들 가운데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아마티야 센의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는 한국사회의 부족한 틈을 메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일 것이다.


완벽한 정의의 기준 보다는 명백한 부정의에 맞서도록

필자가 센의 정의론에 대해 논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사회 문제를 평가하고 틀을 잡을 때, 늘 바탕에 깔리는 원칙과 기준은 정의에 관한 관점이었다는 점에서, 최근 번역된 센의 주장을 읽어보면서 정의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그의 논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센의 정의론에서 일반인들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그가 완벽한 정의에 관한 규칙이나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확정하기보다는 명백한 부정의를 식별하는 쪽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이다. 즉, 완벽히 정의로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지에 집중하기 보다는 “우리 주변에 분명히 바로잡을 수 있는 부정의가 존재하며 그것을 없애고 싶다”고 강조한다. 이는 정의에 관한 엄밀한 개념화에 힘들어하는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사실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정의한 사례들은 차고 넘치지만, 이들을 식별한다고 해서 가장 정의롭고 이상적인 제도가 뭔지를 설명하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센이 대단히 실용적으로 명백한 부정의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그가 정의에 관한 유일한 보편원칙에 전념하기 보다는 정의에 관한 ‘다원적 기준’을 인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책 앞부분에서 피리 하나를 두고 다투는 세 아이 사례를 들고 이를 반복해서 인용한다.

한 아이는 유일하게 피리를 불 줄 아는 아이다. 이 아이는 피리를 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자기가 피리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공리주의자). 두 번째 아이는 오직 자신만이 가난해서 장난감이 없으므로 자신이 피리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경제평등주의자). 마지막 세 번째 아이는 바로 그 피리를 손수 힘들여서 만든 아이인데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피리를 자기가 갖는 것이 당연한데 다른 아이들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불평한다(강경한 자유 의지론자).

여기서 “성취의 추구, 빈곤의 퇴치, 혹은 자신의 노동 산물을 누릴 자격에 입각한 각각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쉽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며, “모든 해결책에는 중요한 논거가 있기 때문에 자의적 판단 없이는 어느 한 가지를 가장 낫다고” 표명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논지가 자의적이지 않고 나름의 기준에 따라 공평한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에서 그는 마이클 왈쩌와 유사한 다원적 정의 기준을 제시한다. 즉,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정의의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합당한 입장이 여럿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부정의를 진단하는데 바로 그 주도적인 이유라 하여 특정한 단 하나의 근거에 합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가능성이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사회 선택

그러면 센의 입장에서 “공평한 합의를 이끌어낼 완벽히 공정한 사회적 장치 같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의의 객관적 기준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는 “실제로 직면하는 선택에 대해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늘 부분적 해결의 허용 가능성이 존재하며 최소한 일정하게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 정도의 길은 열려있다는 입장이다.

센이 이런 위치에 서는 배경에는, 그의 정의론이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롤스나 드워킨 등 다른 학자들과 달리 ‘사회선택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18, 19세기 콩도르세 등에 의해 개발되고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Arrow's impossibility theorem’로 유명해진 “사회선택이론은 사회의 선택지들 중에서 택할 때 사회적 판단과 공적 결정을 위한 합리적 기초”를 찾아내는 이론이다.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기도한 케네스 애로는 “어떤 사회선택의 절차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도 사회 구성원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정당하게 배려되어야 할 아주 가벼운 조건들마저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하는 유명한 불가능성 정리를 발표하여 이후 수많은 이론과 논쟁을 촉발시켰다고 알려졌다. 사실 사회선택이론은 개인적 판단을 집계하는 방법이나 절차, 조건 등을 살펴보는 것이기에 개인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지만, 센은 좀 더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선택지들의 순위에 관한 공적 추론에 근거한 합의”를 현실에서 어떻게 이룰지에 집중하고 있다.

비록 센의 정의론의 차별성이 사회선택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다. 센이 독자들과 얘기하고자 하는 범위는 어떤 대목에서는 정의에 관한 아이디어를 훨씬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정의론의 핵심이면서도 다소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역량이론, 자유와 행복이론, 공적 이성과 민주주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롭다. 본인이 밝힌 것처럼 이 책이 1984년부터 2008년까지의 연구의 집대성이라는 점도 이런 다채로움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센은 자신의 정의에 관한 생각을 펴면서 특히 존 롤스와 아담 스미스를 반복해서 인용하고 비교한다. 센은 롤스의 정의론에 여러모로 대비되는 비판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롤스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거듭 강조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센은 아담 스미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데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 그 중에서도 공정한 관찰자 입장을 반복해서 인용한다.

번역자가 센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무난하게 번역된 것 같다. 또한 센의 문체 자체도 롤스 등에 비하면 그리 딱딱하거나 건조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비록 철학 서적이지만 도전해볼만 하다. 물론 이 책은 틀림없이 대중서로 쓰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며 본문만 470여 쪽이라 분량이 작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워낙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므로 꼭 일독을 권한다. 2010년대 한국사회에 다양하게 던져진 정의에 관한 논쟁들을 스스로 성찰하고 2020년대를 향한 사고틀을 고민하는데 틀림없이 유익하리라 믿는다.

김병권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