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종 체제, 회고와 전망

     

화폐가 일상을 지배하게 되자 주민들은 화폐를 획득하기 위해 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폐적 관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돈주’로 대표되는 화폐권력자들이 기존의 권력 엘리트와 결탁했다. 이로써 북한 사회는 ‘후견-피후견’의 금권적 가산체제의 모습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1. 수령공동체의 시대

북한은 해방 이후부터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를 착실히 구축했다. 그리고 독특한 사회구성체를 완성해냈다. 그것은 수령에 대한 충성과 혁명에 대한 열의가 주민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행위의 준거가 되는 수령공동체 사회였다. 수령은 모든 사회적 생산물을 집중시키고 배급을 통해 재분배하는 경제 질서를 통해 주민을 통제했고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 냈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욕구를 공동체에서 해결해 주는 수령공동체에서는 화폐의 작동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 당국은 화폐가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적 요소를 우려했다. 사회주의 화폐의 특성이 그렇듯이 북한에서 화폐는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욱 엄격히 화폐기능이 사회적으로 발현될 조건을 차단하였다. 경제 위기 이전까지 북한 사회에서 화폐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2. 고난의 행군과 화폐의 부활

북한 경제시스템의 강고한 구심력이 타격을 입은 것은 1990년대의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경제 위기는 시스템을 지탱했던 두 개의 모듈 중 하나인 물적 토대를 붕괴시켰다. 북한은 ‘중심성’(centricity)의 사회적 지지구조를 바탕으로 짜여진 ‘재분배’(redistribution)체제였다. 자원은 중심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중심에서 흩어지는 이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재분배 시스템을 보완하는 기제로 농민 시장을 대표로 하는 ‘호혜’(reaprocity)적 나눔이 주변부에서 존재하는 정도였다. ‘생산의 완전 계획화’, ‘소비의 배급제’, ‘무역의 국가독점’으로 유지되던 경제시스템은 외부의 충격에 무력했다. 세 가지의 제도가 떠받치고 있던 경제 질서, 즉 등가 체계는 무너져 내렸다. 재분배 장치는 망가졌고 주민들은 기아선상에 내몰렸다.

이때 죽어있던 화폐가 작동했다. 화폐의 기능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화폐를 매개로 하는 사회관계를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화폐 경제는 확산되었다. 그 결과 시장도 활성화되어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농민 시장을 전국적으로 연결시켰다. 배급제의 붕괴로 와해된 재분배시스템도 급속히 메우기 시작했다. 화폐적 관계는 생산과 유통을 조직하고 상품 생산을 촉진했다. 수령의 신성함도, 당의 권위도, 결코 생존을 위한 욕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주민들은 화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의 경제 위기가 실물경제와 재정을 황폐화시키자, 북한 당국은 국영기업에 대부하는 형식으로 통화를 증발하기 시작했다. 통화는 곧 범람했고, 인플레이션은 상시화 되었다. 한편, 19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시장은 주민들이 주도하는 자생적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지배권력은 시장에 자신들의 의지를 투사하기 시작했다. 최고 권력자는 그동안 전유하고 있었던 사회적 과정을 하위의 권력 집단에 양도하기 시작했다. 가산제식 권력분배의 핵심은 시장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특권’을 배분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배자와 가신들은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시장을 종속시켰다. 결국 ‘아래로부터’ 조직된 시장은 ‘위로부터’ 기획된 권력에 포획되었다. 곧 ‘자기조정시장’이 완성되었으며 권력은 전 사회적 생산성을 수취하는 기제로 시장을 이용했다. 관료적 시장이 성립된 것이다. 물론 시장에서 뽑아내는 이윤은 화폐적 형태였다.


3. 시장의 번영과 돈주의 성장

화폐가 일상을 지배하게 되자 주민들은 화폐를 획득하기 위해 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폐적 관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돈주’로 대표되는 화폐권력자들이 기존의 권력 엘리트와 결탁했다. 이로써 북한 사회는 ‘후견-피후견’의 금권적 가산체제의 모습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권력 집단은 시장에 대한 독점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사보타주’를 실행했다. 시장에 대한 물리적 단속으로 대표되는 사보타주는 시장을 압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뜯어내려는 권력 집단의 영리행위이다. 사보타주를 통해 사회에 대한 청구권으로써 ‘화폐’를 확보한 권력 집단은 다시 사회적 과정에 투입하여 확대재생산했다.

사보타주의 정점에 2009년 화폐 개혁이 있다. 북한 당국의 통화 증발은 자신이 권위를 부여한 화폐가치를 희석시키고 주조차익을 추구하는 부도덕한 행위이다. 이것은 화폐 발행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지대추구행위(rent seeking behavier)이며 주민들의 돈을 빼앗는 행위이다. 그것도 모자라 수령공동체는 화폐 환수를 통해 일정한도이상의 화폐보유자에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2009년 11월의 화폐 개혁이다. 그러나 화폐 개혁은 주민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더욱 등을 돌리게 했다. 오히려 신뢰할 수 없는 국정화폐 대신 외화를 섬기고 통용함으로써 지배층에 저항하게 했다.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화폐 개혁이 반복된다면 통화는 외화로 완전히 대체되고, 화폐주권과 주조차익의 상실이 대가로 주어질 것이다. 5차 화폐 개혁은 가장 극단적인 사보타주이며, 권력 투쟁이었다. 이를 통해 계획 경제를 신봉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참패하였다. 결과적으로 화폐를 매개로 사회적 관계가 확장되는 흐름은 막을 수 없게 되었다.


4. 비사회주의 현상과 물신숭배(Fetishism)

화폐 경제의 확장은 기존의 북한체제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모듈, 즉 ‘집단주의적 도덕 경제’ 이념을 급속히 해체하고 있다. 공동체의 물적 토대는 붕괴했지만 문화적, 정신적 토대인 ‘도덕 경제’는 물질적 조건에 비해 시간적 지체(time lag)가 발생하기 때문에 완전히 와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비사회주의 현상과 물신숭배(Fetishism)는 기존 공동체의 도덕적 준거(Reference)를 말살하고 있다. 주민들은 화폐적 관계망에 포획되어 돈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화폐화를 통해 전개되는 경제 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북한체제는 사회적 관계에 전체 인격을 투입했다. ‘사회주의 도덕 경제’에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은 타인을 통해 비준되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의 삶이 화폐적 관계로 구성되면, 사람의 인격은 해체되어 화폐의 배후에 숨게 된다. 화폐로 인해 형성된 권리, 의무만 수행할 뿐, 개개인은 결코 인격체로 활동하지 않는다. 즉, 기능적 측면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고유한 인격적 측면은 고려되지 않는다. 당연히 화폐적 관계는 사회주의의 도덕적 준거를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든다.

화폐 경제는 경제적 의존도를 더욱 높게 만든다.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성격도 더욱 강화한다. 화폐를 매개로 한 관계는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가 창출한 사회적 관계는 인격적인 것이 아니므로 개인의 자유는 증가한다. 상대방은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는 우리 삶의 상호 의존성에서 인격적 요소를 제거해준다. 과거에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밀접하고 대체 불가능한 인격적 관계를 이루었다. 이제 화폐는 천혜의 원시림을 쓸어버리는 벌목용 장갑차처럼 공동체의 흔적을 말살해갈 것이다.

북한의 화폐화와 경제 사회적 변화의 결과물로 시장이 팽창하고 있다. 북한이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며 이룬 놀라운 변화는 가격결정시장의 성립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제도화되어 있던 공동체를 통한 재분배 구조를 단기간에 허물었다. 물론 관료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기는 하나 시장이라는 지배적 힘에 종속되어 모든 물적ㆍ인적 자원이 조직되는 사회로 변형되고 있다. 북한 사회는 스스로 이 놀라운 장치 속에 몸을 던졌다. 거대한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안에서 분쇄되고 재구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5. 황금 주판을 두드리는 혼종 체제

주민들이 물질생활의 충족을 위해 공동체와 이웃에게 의존하던 상호작용은 시장으로 대체되었다. 당면한 생존의 문제는 시장으로 인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사회를 온전히 포섭하면, 화폐 권력의 작동은 주민들을 또 다른 굴종의 삶으로 굴러 떨어지게 할 것이다. 화폐적 관계는 소박한 공동체의 가치를 멸절시키고 있다. 화폐적 관계의 확장, 결과는 아마도 사회의 황폐화가 될 것이다.

이제 북한 주민들에게 펼쳐진 시장은 일상이 되었고, 유영(遊泳)하는 화폐는 욕망이 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공통된 경험이 조직 속에 체화된 공동체의 임종을 맞기도 전에, 현금 결합 관계가 곧 인간관계가 되는 화폐 권력의 포로가 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화폐의 무한한 교환가능성, 가치축적성, 그리고 권리를 요구하거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지불(청산)능력에 복종하게 되었다. 인간 행위마저도 화폐라는 저울에 달아 추계하는 척도기능은 화폐적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폐를 마음에 영접한’ 개종자들이 양산되었다. 주민들은 오래된 신단(神壇)위에 모셔진 수령을 밀어내고 새로운 신, 화폐를 모셨다. 지배 세력의 견제와 혹독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권력이 탄생했다. ‘돈주’를 비롯한 화폐 권력자들이다. 화폐 권력은 서서히 공적 부문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수령공동체의 도덕적 준거는 무력화되고 주민들은 화폐 권력이 주는 파상적 공세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는다. 뇌물과 부패가 일상화된다. 경제의 전 영역이 화폐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화폐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계기를 확장한다. 시장은 구체적 시장에서 추상적 시장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확대된다. 화폐적 관계도 팽창해간다. 반면 사회주의 공동체는 위축된다. 겉으로는 수령의 은덕에 감격해하지만 수령이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주민들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기존의 공동체가 딛고 있는 발판은 급속히 축소된다.

화폐 권력자들은 경제의 여러 영역에서 화폐를 투입하여 생산성을 짜내고 있다. 주민들도 사적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열을 올린다. 북한은 기존 공동체를 해체하고 한 단계 더 높은 형태의 공동체로 도약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묘한 체제의 덫에 빠진 듯하다.

팽창되는 화폐적 관계와는 대조적으로, 기존 공동체는 주춧돌만 남은 노쇠한 모습이다. 허물어진 옹벽 사이로 화폐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향(Orientation)이 주입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수령-당의 무오류한 신성성이 끊임없이 선포되는 가운데, 내면에는 탐욕스러운 미다스가 웅크리고 앉아 황금 주판을 두드리는 혼종(hybrid)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민영기 /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