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에도 계급이 있다’ - 자기 서사의 양극화

     

논란 당사자가 복잡한 이성 관계에서 갑의 지위를 유지한 비결은 자기 콤플렉스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포장하는 재주였다. 반면, 자기 상처나 콤플렉스를 먼저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들은 늘 을의 지위에 놓였다.

기자 노릇하던 시절, 어떤 논란에 휩싸인 사람에 대한 제보를 연거푸 받은 적이 있다. 논란 당사자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바짝 긴장하고 들었는데, 곧 자세가 풀렸다. 당시 논란거리와는 일단 별개였다. 제보한 이들 역시 꼭 기사화되리라는 확신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논란 당사자가 너무 싫었는데, 자꾸 화제가 되니까 속에 있던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보한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논란 당사자는 이성 관계가 아주 복잡했다. 제보자는 ‘농락’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조금 애매하게 들렸다. 연애 관계에서 ‘갑질’을 했다는 표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기사 소재라는 생각은 곧 사라졌다. 그러니까 다른 게 궁금해졌다. 논란 당사자는 외모나 프로필이 딱히 화려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이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걸까.


그는 어떻게 연애 갑질에 성공했나

몇몇 제보자들의 긴 설명은 짧게 요약됐다. ‘콤플렉스 활용하기’, ‘들었다 놓았다’. 이렇게 딱 두 가지였다. 젊은 사람들의 콤플렉스는 유형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외모, 공부, 집안 등.

미인대회 입상자가 아니라면, 외모가 뛰어난 사람도 볼 품 없는 구석이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다. 외모가 빼어날수록, 이런 구석에 더 신경이 쓰인다. 논란 당사자가 매력적인 이성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한 비결은 별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상대 외모의 약점을 슬쩍 비꼰다고 한다. 다만 상대가 아예 돌아서지는 않는 수준은 유지한다. 그러다 확 돌아서서 ‘그래도 너는 예뻐’라고 한다. 이어 자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함께 털어놓는다고 한다.

전형적인 ‘들었다 놓았다’ 수법이다. 군대 다녀온 남성들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내무반 후임 병을 잡을 때, 처음에는 일단 세게 다잡아야 한다. 얼마 뒤에 풀어준다. 그러면 사회에서 제법 거칠게 살았던 후임도 금세 고분고분해진다. 이런 순서를 뒤집으면,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바보 취급 받는다. 옛날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딱히 내세울 매력이 없는 남성이 곱게 자란 예쁜 여성에게 처음에 거칠고 퉁명스럽게 대하다 결국 사귀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멋진 문장으로 미화됐지만, 골격은 그냥 군대 내무반 방식이다.

공부 콤플렉스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가 다니는 대학에 대해) 그것도 대학이냐’라고, 지르고 시작한단다. 혹은 상대의 교양 부족을 거칠게 타박한다. 그리고 얼마 뒤 ‘실은 나도 공부 못했다. 나도 무식해서 늘 창피했다. 머리, 더럽게 나빴다’라고 고백하면서 확 풀어준다고 한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된다. 역시 군대 내무반 방식이다. 어설픈 인권 의식에 젖어, 후임병에게 처음부터 잘해주면 안 된다. 그러다 나중에 싫은 소리 한 번 하면, 분명히 맞는 이야기를 했는데도, 바보 취급받는다. 대신 처음에 화끈하게 괴롭히다 조금씩 풀어준 선임병은 두고두고 좋은 평판을 유지한다.


자기 콤플렉스를 활용하는 재주

집안 콤플렉스는 더 적나라하다. 초등학교 ‘실과’ 과목, 지금도 있다. 과목 내용은 시대마다 달랐다. 예전에는 간단한 요리, 목공 등을 가르쳤다. 어릴 때 실과 교과서를 보며 느낀 위화감은 아직도 생각난다. 영양 균형을 고려한 표준 식단이 교과서에 소개됐는데, 영 낯설었다. ‘밥상에 이렇게 자주 고기반찬을 놓는 집이 흔한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묘사된 가족 풍경은 더 낯설었다. 달동네 서민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를 묘사한 드라마인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도시에서 흔한 풍경이 하나도 없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몰려온 뜨내기들이 ‘목돈’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곗돈을 붓는다. 그런데 ‘계’를 관리하던 ‘오야’가 밤중에 갑자기 튀었다. 동네가 뒤집어진다. 그런데 드라마에는 왜 이런 모습이 없지?

조금 지나니까, 이런 위화감을 나만 느낀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남자 아이들은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저절로 깨닫는다. 교실을 묘사한 드라마에 주먹다짐이 없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의 세계란, 약하면 비굴하고 강하면 탐욕스러운 야생 정글이다. 그러니까 교과서나 드라마가 현실과 달라도, 대개는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천천히 스며드는 생각은 있다. ‘표준’과 ‘정상’에 대한 생각이다. 드라마나 교과서를 보며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아버지가 정규직으로 일하고 가족 관계가 화목한 중산층 4인 가정’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가정 자체가 아주 드물다. 애초 ‘중산층’이라는 표현 자체가 허구적이다. 앞서 연재한 글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 흔히 이야기하는 중산층이 실제로는 상위 계층이다. 소득, 자산, 교육 수준이 실제로 중간인 집단은 흔히 이야기하는 중산층에 한참 못 미치는 생활을 한다. 설령 흔히 이야기하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해도, 즉 상위 계층이어도, 가족 관계가 화목한 집안은 정말 드물다. 이혼 통계를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숫자가 싫다면, 서울지하철 교대역에 가보면 된다. 온통 이혼 소송 전문 변호사 광고다.

그럼에도 정상 가정의 이미지가 워낙 강력한 탓에, 자기가 비정상 가정에서 자랐다는 콤플렉스를 지닌 이들이 많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사람은 다 집안 콤플렉스가 있다. 논란 당사자의 과거사를 제보한 이들이 한결같이 한 이야기도 이 대목이었다. ‘불우한 가정사’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었단다.

결국 논란 당사자가 복잡한 이성 관계에서 갑의 지위를 유지한 비결은 자기 콤플렉스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포장하는 재주였다. 반면, 자기 상처나 콤플렉스를 먼저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들은 늘 을의 지위에 놓였다.


‘석주 형’과 ‘명숙’의 만남

제보 내용을 기사로 쓸 수는 없었으나, 깨달은 바는 선명했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경험은 이야기로 짜내기가 쉽다. 반면 어떤 경험은 도무지 이야기로 만들 수 없다. 설령 이야기로 엮어도 반응이 없다.

연재 지난 회에서 김소진의 소설 「개흘레꾼」을 소개했다.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가 자본가였다. 이 땅에서 품위 있는 부자는 씨가 말랐으므로, 아마 졸부였을 것이다. 집안에선 폭력적인 마초 가부장, 집밖에선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가혹한 업자였을 게다. 그의 자식은 아버지를 보며 적의를 품는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아들들이 꾸렸다는 살부계(殺父契)의 역사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살부계는 아버지가 친일파였으므로, 그래서 민족주의를 등에 업었으므로 가능했다. 이런 예외가 아니라면, 아버지와 싸우는 자는 패륜의 낙인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체제와 싸우는 쪽이 편하다. 독재, 혹은 자본주의 체제와 적당히 갈등하면, 아버지와는 저절로 불화하게 된다. 패륜의 낙인은 피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아버지와 싸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과 혹은 독재나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자기 이야기인데, 금세 보편성을 얻었다. 그게 기득권이다. 누군가는 정말 진부한 사연으로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비슷한 사연이 공론 장에 쌓여 있으므로, 이야기를 던지기만 하면 울림이 생긴다.

그들이 아버지와 화해하는 순간, 그들은 세상과도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기득권을 물려받았다. 가부장에게 반항하는 쾌감과 가부장의 기득권을 모두 누린 부류다. 이 과정에서 만든 이야기는 두고두고 써먹을 권력 밑천이다. 실은 앞서 이야기한 논란 당사자가 이런 사람이었다. 소설 「개흘레꾼」 속 문장을 다시 보자.

“석주 형은 아버지가 마련해 준 기득권의 토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형이 머릿속에 그리는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자본가적 잉여가치를 취하는 한 아버지는 극복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형의 논리 앞에 나는 얼마나 기가 죽었었던가.”

소설 속 주인공의 운동권 선배인 ‘석주 형’이 이런 경우였을 것이다. 어쩌면 86세대 운동권 정치인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혹은 드라마 <모래시계> 속 여주인공 윤혜린(고현정 분)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겠다.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 혹은 영화 <파업전야>에 나오는 생산직 노동자였다. 이들은 「개흘레꾼」 속 ‘석주 형’과는 다른 이유로 이야기를 만들기가 쉽다. 어떤 이들에겐 이들의 아버지가 사회 변혁의 주력군이다. 따라서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필요 없다. 그냥 빨치산, 혹은 노동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다른 어떤 이들에겐 이들의 이야기가 아예 안 통한다. 누구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이야기를 짜낼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들을 다룬 이야기는 상투적이고 지루하다. 1980년대 민중문학 관련 작품 다수가 그래서 실패했다고 본다. 어차피 절실한 이야기가 필요 없는 소재와 주제였다.

소설 「개흘레꾼」에서는 주인공의 운동권 동기 ‘명숙’이 이런 경우였다. 소설에선 ‘석주 형’과 ‘명숙’이 결혼한다. 결혼에 앞서 연애를 했을 터,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기 편한 ‘석주 형’과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없는 ‘명숙’의 연애는 상징성이 있다. ‘석주 형’은 설령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더라도, 다양한 연애 관계에서 갑의 지위를 누렸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 이야기를 짜내기가 쉽다는 점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이야기가 필요 없다는 점은 그 다음 서열 권력이다. ‘명숙’은 어떤 이들에겐 투명인간 취급 받았겠으나, 다른 어떤 관계에선 갑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이야기와 권력의 양극화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개흘레꾼의 자식은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나. 개흘레꾼의 자식도 제 아버지와 싸운다. 하지만 개흘레꾼 아버지와의 갈등은 도무지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집 안에서 개흘레꾼과 싸우는 녀석이 집 밖에서 민중을 떠들고 자본가와 맞서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실과 교과서에서도, 달동네를 배경 삼은 드라마에서도, 개흘레꾼의 자식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야기에 기대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결코 적운 숫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늘 주변으로 밀려났다. 공론장의 가운데를 차지한 이야기와 접점이 없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적다. 실은 이야기가 권력이다. 이야기가 가난한 이들은 권력도 부실하다.

작가 김소진은 실제로도 도시 빈민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이야기가 가난한 이들을 주인공 삼아 소설을 썼다. 예컨대 노동자 열사의 시신을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지키는 투쟁의 현장을 그린 소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주인공은 이른바 ‘밥풀때기’다. 노동자도, 학생도 아니면서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던 이들, 소설 속 ‘밥풀때기’ 가운데 한 명인 브루스 박은 밤무대에서 악사로 일한다. 그가 왜 ‘밥풀때기’ 소리를 들으며,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 현장에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사고로 죽었을 때, 두 줄짜리 기사에 ‘박상선’이라는 이름이 적힐 따름이다.

개흘레꾼, 밥풀때기…. 이처럼 자기 이야기가 가난한 이들이 소설과 영화, 드라마를 이끄는 모습. 작가 김소진이 세상을 떠난 뒤론 거의 못 봤다. 대신, 이미 비슷한 이야기가 넘쳐흐르는 이들의 사연만 흔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지금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중년 아저씨들은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가 쉽다. 이야기가 곧 권력이므로, 그들이 지금 권력을 누린다.

이야기가, 자기 서사가 양극화돼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돼 곳곳에서 울린다. 직장 사무실, 휴게실, 화장실, 식당, 술집.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하지만 개흘레꾼과 밥풀때기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듣지 못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짜내기가 어렵다. 먼저 나온 이야기가 없는 탓에, 얼어붙은 맨땅을 파헤치며 이야기를 긁어내야 한다. 그 힘든 일에 도전하는 이가 김소진 이후로는 드물었다. 이야기가 권력이다. 이야기가 양극화 돼 있으니, 권력이 양극화돼 있는 것도 당연하다.

성현석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