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식이 철 들지 않기를 바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들이 잘 보여줬다. 성년을 훌쩍 지난, 대학원생인데 부모로부터 자립하지 않았다. ‘부모 찬스’를 쓰는 상위 중산층 자녀들은 빨리 영리해지지고 천천히 철이 드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천천히 철이 들어도 된다는 특권을 최대한 활용한다. 

“은수미가 박사 따던 날”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날 제 마음 속 가시가 빠졌단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은수미 성남시장은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을 했고, 대학을 떠나 노동현장에 들어갔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활동을 했고, 옛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을 오래 앓았다고 한다.

은 시장의 옛 동료들에게 이런 사연은 마음에 박힌 가시였다. 반짝이는 수저를 물고 태어나 주류 엘리트가 되는 길을 순조롭게 걸어갈 수 있었던 친구가 스스로 민중의 바다에 몸을 던졌고, 국가권력의 발톱에 짓이겨 졌다. 한때나마 그와 뜻을 같이했다면, 마음이 결코 편할 수 없다.

은 시장은 1997년에 대학에 돌아와 남은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은 시장은 1999년 『관악문화』라는 대학 내 자치 매체에 기고한 「90년대의 대학,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라는 글에서 30대 중반 나이에 돌아온 대학에서 만난 운동권 구호를 보며 느낀 낯선 감정을 이야기했다.

“97년 대학에 들어와 내가 처음 발견했던 선전물은 ‘양키 고우 홈’이라고 새겨진 작은 스티커였다. 아직도 10년도 더 지난 낡은 구호가 사용된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당시에는 피처럼 선명했던 구호가 이제는 대학의 장식품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부채의식이 사라지자, 책임과 연대도 잊었다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대학을 떠난 뒤 1990년대에 다시 대학을 찾은 이들이 흔히 토로하는 정서다. 은 시장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소련 해체 이후의 대학과 사회에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고 국책연구기관에 취업했다.

그 순간, 은 시장의 옛 동료 가운데 많은 수가 제 마음 속 가시를 뽑아냈다. 민중과 함께하느라 극심한 고초를 겪었던 옛 동료는, 그 자체로 고학력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부채의식을 심는다. 그런데 그 동료가 자신들이 속한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속 풍경이 바뀐다. 부채의식이 사라진다. 아파트와 자가용을 사고, 승진 경쟁에 뛰어들며, 자식에게 입시 준비를 독려할 때마다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녹아내린다. 내가 빚을 졌던 이에게 느끼는 미안한 감정이 사라지고, 비슷한 계층끼리 느끼는 동류의식이 그 자리를 메우는 순간, 내 눈 앞에 띄는 것은 나보다 앞서가는 이들이다. 나보다 덜 배웠으면서도,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들. 나보다 더 좋은 차를 몰고, 더 좋은 아파트에 살며, 내 자식보다 공부 잘 하는 자식을 둔 이들.

은 시장의 옛 동료 중에는 이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경쟁에 익숙한 이들이 흔했다. 평균 점수가 60점인 시험에서 늘 90점을 받았는데, 어쩌다 80점 받고서는 ‘시험 망쳤다’라며 울던 이들. 눈물 어린 눈으로 100점 받은 아이만 노려볼 뿐, 60점 이하 점수를 받은 절반은 머리에 담지 않았던 이들. 은수미 박사가 제도권에 들어서는 순간, 옛 동료 가운데 많은 수가 그 시절로 돌아갔다. 겉치레로도 민중을 입에 담지 않는다. 어쩌다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 되면, ‘서민’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은 시장이 1999년에 쓴 글 속 문장만큼 익숙한 장면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도권에 들어간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자기보다 더 심한 희생을 했던 옛 동료가 뒤늦게 고시 준비를 하더니 법률가가 됐다.

사노맹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편집위원이었던 백무산 시인의 시 「지식인이라는 완장」 속 한 구절, “결국 어디론가 쳐졌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못난 꼴”을 보였던 동료가 시험 한번 붙더니 나를 앞질렀다. 그 순간, 나도 두 갈래 길에 선다. 앞만 보고 달리거나, 옛 동료의 “못난 꼴”은 싹 잊어버리고 그와 친해지거나.

부채의식, 빚을 졌다는 느낌이 사라진 이들은 더 이상 그들이 속한 세계 밖을 볼 필요가 없다. 빈 말로라도 ‘민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에게도 빚 지지 않았다고 믿는 이들은 늘 당당하므로, 굳이 폭넓은 연대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빚을 지고 있다고 믿어야, 그래서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겨야, 눈에 보이지 않던 이들과 연대할 마음도 든다. 누구에게도 책임질 일 없고, 눈은 늘 앞을 향하고 있다면, 내가 할 일은 나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따라잡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뒤쳐져 있을 뿐이며, 뒤를 돌아볼 책임이 없다면, 다른 약자와 연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들이 민중연대 대신 각자도생을 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시간이 쌓여, 옛 운동권 세대가 50대 관리자가 됐다. 그러니까, 이젠 상위 10~20퍼센트 계층이 겸손하게 중산층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하위계층과 구분 짓는 성을 쌓아올리는 데만 골몰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온다.

실제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 벌어져 왔다. 중산층을 자처하는 상위 계층은 정치적 자유에는 관심이 있지만, 자신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의제에는 놀라울 만큼 무관심하다. 그 결과, 한국은 부자뿐 아니라 중상위 계층이 내는 세금 역시 비슷한 경제 규모를 지닌 외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나라가 됐다. 중상위 계층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니까, 자신들도 세금을 많이 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만이다. 만약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게끔 할 수 있다면, 자신들도 세금을 더 낼 건가. 실제로 세금은 누진 방식이므로, 중상위 계층이 세금을 더 내면, 부자들의 증세 폭은 훨씬 확대된다. 아울러 탈세를 막기 위한 사회적 압력 역시 강화된다. 세금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니까, 탈세 혐의에 대한 분노 역시 확대되는 것이다.


누구나 입시 경쟁을 격렬하게 치렀으므로, 정유라의 입시 부정이 폭발적인 분노를 낳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입시 경쟁을 소수만 치렀다면, 혹은 입시 경쟁의 밀도가 낮았다면, 입시 부정에 대한 분노 역시 뜨겁지 않았을 것이다. 입시 부정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감시 역시 느슨했을 것이다. 부자들의 탈세를 막으려면, 아울러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게 하려면, 그렇게 해서 확대된 공공재정으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려면, 중상위 계층에 대한 증세 역시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민중과의 연대를 이야기하던 옛 운동권 가운데 많은 수가 50대 나이의 중상위 계층에 편입되자, 증세는 정치권에서 금기 사항이 돼 버렸다. 상위 중산층의 위선과 기만을 질타하는 저술이 최근 쏟아지는 것 역시 당연한 결과다.


그들은 왜 철이 들기 싫었던 걸까

하지만 누구도 평생 앞만 보고 뛸 수는 없다. 그게 사람이다. 아주 가끔은 뒤도 살피게 된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삶의 출발점에서 만난 첫 어른, 대개 제 아버지다.

”내가 철 들어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 들지 않겠다 / 오직 사랑과 믿음만으로 굳게 닫힌 가슴 열어내고 / 벗들을 위하여 서로를 빛내며 끝까지 함께 하리라.”

‘조국과 청춘’이라는 민중가요 노래패의 <새 세대 청춘송가>라는 노래 가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 민족해방(NL) 계열 노래패다. 그런데 NL이라면 질색하던, 다른 계열 운동권 학생들도 유독 이 노래는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운동권과 전혀 관계없던 누군가가 이 노래를 듣더니 “가사가 참 좋다”고 했던 기억도 있다.

먼저 철이 든 사람들, 어른들은 다음 세대에게도 빨리 철이 들라고 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자기 아버지처럼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등교육 기회가 늘어난 세대는 아버지의 세계가 얼마나 썩은 곳인지를 일찍 알아버렸다.

누군가는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기를 열망했다. 앞서 연재한 글에서 소개한 개흘레꾼의 아들은 예비 지식인의 터전으로 꼽히는 대학에 들어갔다. 지식인이 되면, 비굴한 개흘레꾼의 세계와 완전히 절연하게 되는 건가. 그게 모호했으므로, 「개흘레꾼」의 작가는 고민이 깊었다.

다른 누군가는 아버지와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유교 전통이 깊은 사회에서 아버지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다른 쪽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개흘레꾼」 속 ‘석주 형’, 혹은 <모래시계> 속 ‘혜린’이 그랬다. 아버지가 건설업자, 주류도매상, 사학 이사장, 카지노 업자, 투기꾼이었던 그들.

“내 결코 철 들지 않겠다”라는 노랫말에 너나없이 열광했던 배경에는 어쩌면 아버지처럼 살기 싫은데,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살게 될, 결국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살아갈 이들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됐다. 누구나 알고 있듯, 학업 성적이나 집안 경제력이 상위 10퍼센트 안쪽에 속하던 이들이, 다니던 대학에서 돌을 던지던 이들은 이제 대부분 자기 아버지와 화해했다. 은 시장의 옛 동료 가운데 많은 수가 그랬다. 아버지와 싸우는 대신 세상에 분노했던 것이므로, 아버지와 화해한 그들은 이제 세상과도 싸우지 않는다. 옛 운동권만이 아니다. 최근 출간된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지음)에서 잘 설명한 상위 10퍼센트 계층, 학력고사 시절 입시 배치표 상단에 있는 대학을 나와 호경기에 취업을 했고, 지금은 관리직이 돼 있는 이들 대부분,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아랫세대로 비슷한 이력을 지닌 집단이 그렇게 산다.

화해에는 상징이 필요하다. 친구끼리 투닥거린 뒤 털어 넣는 소주 잔, 혹은 조직 폭력배들이 영역 다툼을 멈춘 뒤에 단체로 벌이는 오입질, 혹은 몸에 새기는 문신.

학력고사 세대가 아버지와 화해한 상징은 아파트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화해한 징표가 ‘뒤늦게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얻어낸 대학 입학 통지서’였다면, 청년 시절 아버지에게 날리고 싶었던 주먹을 세상에 휘둘렀던 이들이 고른 화해의 징표는 명문대 진학률 높은 8학군 지역에서 사들인 아파트다. ‘내 집 마련’을 평생 꿈꿨던 아버지 세대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만한 게 없다.

이들은 대기업 부장과 아파트 소유주가 됐으므로, 청년 시절의 일탈이 그저 우회로에 불과했음을 부모 앞에서 입증했다. 최루탄 냄새 풍기며 들어온 자식에게 “신세 망치려고 작정했느냐”며 호통 치던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들과 이런저런 연줄이 닿아 있는 옛 운동권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국회와 청와대에 진출했다. 아버지는 운동권을 그토록 싫어했는데, 아버지가 동경하던 권력을 운동권들이 잡았다. 아버지가 틀렸다. 그걸 확인시켜줬으니, 아버지와 싸우고 싶었던 청년 시절의 욕망은 어느 정도 채워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욕망은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점도 확인시켜줬다. 그러니까 화해가 성립한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

아버지의 이런 호통에 삐딱한 사춘기 소년은 이렇게 응답했었다.

“걔들, 나쁜 애들 아니에요. 마음잡고 하면 공부도 곧잘 해요.”

이런 문답은 평생 반복된다.

“운동권 애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

“걔들, 나쁜 애들 아니에요. 결국 부장님 되고 강남 아파트 살 애들이에요.”

아버지 세대와 화해한 징표는 곳곳에 있다. 수구세력을 끌어내리고 권력을 잡은 이들은 스스로가 ‘나쁜 애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려 발버둥 친다. ‘나쁜 애들’의 반대말은 원래 ‘착한 애들’이지만, 오래 전부터, 학창시절에도 그렇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나쁜 애들’의 반대말은 ‘우등생’ 혹은 ‘모범생’이었다.

이미지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610.or.kr/)

50대 나이에도 아버지와의 화해를 갈망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 친구들이 ‘나쁜 애들’이 아닌 ‘우등생’, ‘모범생’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이재용을 구속시켰던 거대한 촛불의 후광으로 권력을 잡았던 이들이 끊임없이 대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택하는 심리적 배경이라고 본다. 아울러 그들이 총선에서 주로 영입하는 이들이 ‘우등생’, ‘모범생’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과격한 애들하고 어울리면 안 된다. 침착하게 살아야지.“

“제 친구 중에 꼭 감정적인 애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논리적인 애들도 많아요. 과학자, 공학자 친구도 있어요.”

그러니까 ‘4차 산업 혁명’ 같은 근거 없는 말을 그냥 주어 삼킨다. 과학이란, 당대의 편견과 통념에 거리를 두고 자기가 확인한 근거에 바탕 해서 자기 머리로 논리를 이어가는 일인데, 과학과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과학-공학의 성과를 소비한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과학적 세계관도, 공학적 방법론도 아니었고, 그저 ‘내 친구 중에 과학자도 있다’라고 말할 기회일 뿐이었던 탓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과학기술의 성취 앞에서 과학적 사유를 멈춘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꼭 필요하다거나, 새로운 기술 트렌드라고 하면 덮어놓고 지지하는 버릇은 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요컨대 그들은 지금도 철이 드는 중이다. 아주 천천히 아버지를 닮아간다. 수십 년에 걸쳐 철이 드는 삶, 어쩌면 특권이다.


빨리 영리해지고 늦게 철 드는 삶, 빨리 철 들고 늦게 영리해지는 삶

여러 면에서 상위 10퍼센트 안팎인 그들은 천천히 철이든 덕분에 사춘기를 길게 보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다른 어떤 이들은 훨씬 이른 나이에 철이 들어버렸다.

상위 10퍼센트, 스스로 중산층이라 부르는 상위 계층 어른들과 그 자녀들은 빨리 영리해지고 천천히 철이 든다. 반면, 그보다 하위 계층에 속한 이들은 천천히 영리해지고 빨리 철이 든다.

대학 진학 기회를 남동생에게 미루고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은 아주 빨리 철이 들었다. 그 집안 형편으로 남매 모두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챘다. 그렇다면, 취업시장에서 유리한 성별인 남성에게 진학 기회를 몰아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빨리 영리해지지는 못했다. 집안의 제한된 자원을 몰아서 쓴 남동생이 좋은 직장을 잡고 나서 그녀에게 과연 얼마나 고마워할까? ‘남들은 대학 나와도 못 들어오는 좋은 회사에 너희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들어왔다’라는 회사의 선전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녀는 이런 의문을 품을 만큼 영리해지기 전에 철이 들어버린 것이다.

빨리 영리해지고 천천히 철이 드는 양상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 심화된다. 『세습 중산층 사회』를 보자. 이 책에선 중산층을 ‘중간 소득 집단’이 아닌, ‘경제적으로 안정된 도시의 중간계급과 도시 및 농촌의 프티부르주아 중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단 그리고 소득이 높은 상층 노동계급을 포함하는 집단’에 가까운 개념으로 쓴다. 소득 상위 1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상위 중간 계급’이다.

2019년 하반기 들어 5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에 대한 비판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비판의 핵심은 이들이 기득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동질적인 ‘세대 집단’으로서 양보를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

이러한 주장들은 대개 지금의 586 기득권은 시스템에 내재화된 기득권이라는 점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또 그들의 기득권 가운데 가장 문제는 계층 세습이라는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문제는 단순히 60년대생들이 90년대생을 착취한다거나, 입시제도가 부유한 중상위 계층에 유리하다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명문대를 나오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적 인정과 경우에 따라 명망까지 가진 80년대 학번~60년대생이 90년대생인 자신의 자녀들이 적합한 ‘능력’을 갖추도록 독려하고, 교육 제도를 잘 이용해 새로운 경제 여건과 시대 상황에 걸맞는 ‘인재’로 키워내는데 성공하는 것 그 자체다.

교육에 기반한 능력 본위 사회를 표방하는 한국 사회에서 세습 중산층의 자녀들은 명문대 학벌과 외국어 능력 및 교양, 잘 양육된 품성 등을 가지고 노동시장에 진출해 1차 노동시장을 독식한다. 이러한 과정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처럼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꽤나 합법적이고, ‘룰’을 그대로 지킨 결과다. 절차의 불공정함이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 또는 능력 배양에서의 불평등이 문제인 것이다. (…)

입시제도를 조금 더 옛 과거제에 가까운 형태로 ‘공정’하게 바꾼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대학 선발 시스템을 이용하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해킹하는 능력에서 세습 중산층을 따라갈 수 있는 계층 집단은 없다. 이는 그들이 단순히 서울 대치동 사교육에 많은 금액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녀의 인적자본 투자를 효율적으로 계획하고, 잘 조율하며,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그들의 경영자적 능력에서 기인한다.

지금의 문제가 ‘세습 중산층의 독주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면, 세대 간 양보론과 교육의 공정성 확보론만큼 그들의 영향력과 독주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세대와 공정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여 ‘세습’이라는 진짜 문제를 숨기면서 적당히 양보하는 척하며 실질적인 손실을 보지 않는 노회한 86식 정치 투쟁의 구호가 한국 사회를 뒤덮는 양상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중산층 자녀들은 “대학 선발 시스템을 이용하는”, 즉 “해킹하는” 능력에 일찍 눈을 뜬다. 빨리 영리해진 것이다. 반면, 철은 아주 천천히 든다. 부모 역시 늦게 철이 드는 특권을 누렸으므로, 이를 당연히 여긴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가 다툴 이유가 적다. 이 대목에서 86세대 중산층 부모와 그들의 자식은 차이가 있다. 86세대 중산층은 부모와 싸웠다.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와 동맹 관계를 맺는다. 자녀에게 중산층 부모란 활용할 자원이다. ‘부모 찬스’라는 표현이 당연하게 쓰인다. 제 아버지와 싸웠던 기억을 지닌 중산층 부모 역시 만족스럽다. 그들의 자녀는 부모와 싸우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세상에 쏟아내느라 궤도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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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들이 잘 보여줬다. 성년을 훌쩍 지난, 대학원생인데 부모로부터 자립하지 않았다. ‘부모 찬스’를 쓰는 상위 중산층 자녀들은 빨리 영리해지지고 천천히 철이 드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천천히 철이 들어도 된다는 특권을 최대한 활용한다. 조 전 장관 세대가 천천히 철이 들어도 된다는 특권을 감추는 외피로 민주화 투쟁을 활용했다면, 그의 자식 세대는 천천히 철이 드는 특권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다. 따라서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를 못 느낀다.

중산층 부모 역시 자식이 빨리 철 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스무 살 성인이 된 자식이 나이에 걸맞게 철이 들어서, 스스로 제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고 한다고 하자. 제 삶을 자주적으로 개척하겠다고 한다고 하자. 중산층 부모들이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그들에겐 자식이 차라리 피터팬이 되는 게 낫다.

세상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으므로, 세상과 일찍 마주칠수록 다칠 위험도 높아진다. 세상과 늦게 만날수록 안전하다. 부모의 관리 속에서 오랫동안 스펙을 쌓고서 세상에 나서야 한다. 세상은 전쟁터인데, 일찍 철 든 서민 자녀들은 맨몸으로 사회에 나온다. 이들은 늦게 철 든 덕분에 부모의 보호 속에서 몸집을 불려서 세상에 나선 상위 중산층 자녀들에게 도륙당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고학력 중산층 부모에게 일찍 철 든 자식이란 곧 재앙이다.

자식도 이런 상황을 잘 안다. 상위 중산층 가정에선 영리하지 못한 자식들만 일찍 철 든다. 총명한 머리를 지닌 조국 전 장관 자녀들이 성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부모 품을 떠나지 않았던 상황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성현석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