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은 어쩌다 얌체가 됐나

     

처음부터 취업을 겨냥했던 9.4%. 그들은 평소 존재감이 없다. 이른 나이에 철이 들었는데, 말과 글을 다루는 훈련은 충분하지 않다면, 존재감을 드러낼 방법이 적다. 그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누군가가 죽었을 때다.

9.4%. 대략 열 명 가운데 한 명 꼴이다. 고등학생 가운데 이 정도 비율이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거나 군에 입대한다. (2018년 2월 고교 졸업자 56만6,545명. 이 가운데 같은 해 4월 기준 취업자 5만2,359명, 입대자 1,047명.)

이는 대학입시를 준비했지만 실패한 경우와 다르다. 진학이 아닌 취업이 목표였고, 이를 달성한 경우다.

12.7%. 대략 여덟 명 가운데 한 명 꼴이다. 2018년 고교 졸업자 대비 서울 지역 대학 입학정원 비율이다. 대학 신입생 가운데는 재수생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재수생 합격률에 큰 변화가 없다면, 올해 재수한 이들이 비슷한 비율로 이듬해에 진학한다. 따라서 고등학생이 서울 지역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12% 안팎이다.


아예 입시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 9.4%

9.4%와 12.7%. 고작 3.3% 차이다. 하지만 말과 글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완전히 다르다. 12% 남짓인 서울지역 대학생이 사실상 청년 전체를 대표한다. 20대 청년 문제를 다루는 언론의 취재 대상 역시 늘 이들이다.

10대 청소년은 으레 대학 입시 경쟁에 찌든 존재로 묘사된다. 과연 그런가. 9.4%, 열 명 가운데 한 명은 아예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0대 청소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열 번 가운데 한 번쯤은 입시 경쟁 바깥으로도 눈을 돌려야 한다. 대학 대신 취업이 목표인 청소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대학 진학은 초등학교 입학과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런 절차다. 대학에 가지 않는 삶은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입시 배치표에서 위에 있는 대학, 취업에 유리하거나 전문직 진출이 보장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 경쟁이 몹시 치열한 탓에, 그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 밖을 돌아볼 틈이 없다.

이렇게 경쟁하는 이들 다수는 점점 영리해진다. 경쟁이 치열하므로, 경쟁의 규칙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들 다수는 규칙 자체를 바꿀 힘은 없다. 대신 규칙의 허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으로 진화한다. 이 대목에서 최순실, 이재용 등 특권층과 다르다. 이들 특권층은 법 위에 있다. 법과 규칙 자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 혹은 법을 대담하게 어겨도 처벌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자녀들은 너무 악착같이 영리해질 필요는 없다.


멍청한 정유라를 보며 그들이 화가 났던 까닭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아래 계층, 앞서 연재에서 중산층, 혹은 상위 중산층이라고 부른 상위 10~20% 안팎 계층은 다르다. 그들은 규칙을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므로 규칙을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영리해져야 한다. 악착같이 영리해질 필요가 없는 계층, 즉 최순실이나 이재용의 자녀를 보며 그들은 결핍을 느낀다. 그들은 규칙을 꼼꼼히 파악해서 활용하는 입장이므로, 공정성에 아주 민감하다. 규칙의 빈틈을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기껏 찾아냈는데, 규칙을 누군가가 살짝 비틀어 버리면, 그간의 노고가 허사가 된다. 그들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시 부정에 분노했던 것, 또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규칙들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들 중산층 자녀들은 그저 영리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규칙의 빈틈을 찾느라 애쓰는 사이, 철이 들 기회는 점점 멀어진다. 세상은 매뉴얼에 적힌 규칙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므로, 규칙을 활용하는데 몰두하다보면, 철이 들기가 어렵다.

이들 중산층보다 하위 계층 자녀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답답하다. 누군가는 그저 영리해지면 된다. 하지만 하위 계층 자녀들은 기껏 영리해져봤자 선택지가 적다. 입시 사교육을 받기 어렵고, 되도록 빨리 취업해서 가계를 지원해야 하는 입장에서 대학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영리하게 찾아낸다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처음부터 취업을 겨냥했던 9.4%. 그들은 평소 존재감이 없다. 이른 나이에 철이 들었는데, 말과 글을 다루는 훈련은 충분하지 않다면, 존재감을 드러낼 방법이 적다. 그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누군가가 죽었을 때다.


자식이 빨리 철들어 다행이라는 부모, 자식이 영리해서 기쁜 부모

고(故) 황유미 씨.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삼성전자 취업이 확정됐다. 성적 상위 30%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는 기회였다. 택시기사인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 유미 씨가 대학에 가길 원했다. 하지만 유미 씨는 남동생에게 진학 기회를 양보하겠다고 했다. 유미 씨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렸다. 아버지가 모는 택시 뒷좌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미 씨의 사연을 소개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는 유미 씨의 취업이 확정되자 아버지가 싱글벙글하며 딸에게 소주잔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산층 아래 계층 부모들은 자녀가 영리해지기보다 빨리 철드는 쪽을 기대한다. 특별한 재능과 열정을 지닌 소수가 아니라면, 대개는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다.

철이 늦게 들면, 사회에서 방황하거나 상처받기 쉽다. 어설프게 영리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대학 대신 공장을 택한 딸에게 축하의 잔을 건넨다. 그 아버지인들, 대학 나와 사무직으로 일하는 게 공장 생산직보다 여러모로 낫다는 사실을 설마 몰랐겠는가. 다만 미처 철이 들지 않은 채 마주치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반면, 중산층 가정 자녀들은 영화의 이런 장면을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대학 갈 성적이 되는 딸이 대학 대신 공장에 간다고 하면, 부모가 화를 내야 한다. 그들의 상식에 비춰보면, 그래야 자연스럽다. 그런데 고등학교만 나와 공장에서 일하는 딸을 둔 아버지가 즐거워하다니, 그들은 납득할 수 없다.

그들은 공장 노동자가 되는 길은 상상해본 적이 없다. 대학에 갈 성적에 도달하지 못해도, 공장에서 기름밥 먹는 일을 직업으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재능과 노력을 쥐어짜서라도 대학에 가야한다고만 배웠으므로, 그들은 이 과정에서 겪는 고통, 입시 경쟁의 부작용에 익숙할 뿐이다. 그들이 상상하는 고통, 그들이 떠올리는 사회 모순은 주로 입시 경쟁과 관련이 있다. 유미 씨처럼, 대학 대신 공장을 택했던 이들이 줄곧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던 탓일 테다.

따라서 중산층 자녀들은 제한된 재능과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해서, 경쟁의 부작용을 완화하고 노력 대비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칭찬을 받는다. 유미 씨가 철이 드는 동안, 그들은 영리해져야 했다.


‘가성비’ 계산에 능숙한 체리피커들

가격 대비 성능, 노력 대비 성적. 중산층에겐 특히 중요한 지표다. 소비보다 투자가 중요하고, 국내 대학 학벌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가 없는 최상위 계층과는 입장이 다르다. 중산층은 작은 일에 대해서도 영리하게 굴어야 한다. 이런 면모를 설명하기에 요긴한 표현이 있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 우리말로는 ‘얌체 짓’쯤 되겠다.

벚나무 밭에서 잘 익은 체리(버찌, 벚나무 열매)만 골라서 따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신용카드 회사 마케팅 부서 등에서 잘 쓰는 표현이다. 여러 회사의 신용카드를 가진 소비자는 혜택에 따라 매번 다른 카드를 쓰곤 한다. 이런 경우, 신용카드 회사가 시장 확대 목적으로 내건 혜택이 기대한 효과를 못 거두기 마련이다. 소비자는 혜택이 주어지는 경우에만 해당 신용카드를 쓰기 때문이다. 마케팅 부서는 이런 일을 줄이려 골머리를 썩인다. 대형 마트에서 물건은 사지 않고 시식만 하는 이들 역시 비슷한 경우다.

‘체리 피킹’을 하는 이들을 ‘체리 피커’라고 하는데, 일상에서도 참 자주 본다. 권리와 책임을 잘 계산해서, 권리는 끝까지 챙기고 책임은 최소화하는 부류다.

사회 정의를 요구할 때도 그렇다. 자기보다 많이 누리는 이들의 기득권은 깨자고 하다가, 그 흐름이 자기 기득권까지 건드리면 이제 멈추자고 한다. 강력한 시장 원리를 주장하는 대학 교수들도 종종 비슷하다. 고용 유연성을 이야기하지만, 정규직 교수는 예외라고 한다. 자기네 일자리는 견고한 안정성이 보장돼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시장 원리 확대를 주장해서 얻는 이익은 최대한 누리되, 부담은 피하겠다는 태도다. 일부 정규직 노동조합 역시 마찬가지다. 평등과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눈은 늘 위를 향한다. 자신들이 늘 가장 아래쪽에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게 평등을 주장하면, 자신들의 처지는 좋아진다. 하지만 그들보다 처지가 나쁜 이들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평등과 연대를 주장하지만, 어느 선에서 멈추는 태도다.

‘체리 피커’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른 사회운동에서도 가끔 보는 장면이다. 어떤 이들은 운동에 참여하면서 느끼는 도덕적 만족감, 인간관계 확장, 견문 확대 등 혜택은 최대한 누리지만, 희생이나 책임이 따르는 순간에는 조심스레 발을 뺀다. 야박하게 말하면, 그들 역시 ‘체리 피커’, 혹은 ‘얌체’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지난 회 연재에서 『세습 중산층 사회』 속 내용을 인용했다. “대학 선발 시스템을 이용하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해킹하는 능력에서 세습 중산층을 따라갈 수 있는 계층 집단은 없다”라고 했다. 역시 중산층이 ‘체리 피킹’하는 행태를 가리킨 내용이다. 대학 선발 시스템 등 여러 분야의 규칙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능력은 어쩌면 중산층이 상류층보다 우월하다.

앞서 설명했듯, 재벌 등 최상위 계층은 규칙 자체를 바꾸거나 혹은 불리한 규칙을 비켜갈 능력이 있다. 규칙의 허점을 깊이 따지느라 힘 빼느니, 차라리 쉬는 게 낫다. 맑은 머리로 투자 결정을 해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

요컨대 최상위 계층은 지나치게 꼼꼼한 것보다 적당히 순진한 쪽이 더 효율적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 분)의 부인인 연교는 극단적으로 순진한 성격이다. 너무 각박하게 머리 굴리느라, 상류 사회에서 인심을 잃는 쪽보다는 순진해서 작은 손해를 보는 쪽이 크게 보면 낫다. 반면,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은 다르다. 기택은 아들에게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고 말한다. 상징성이 큰 장면이다.
‘계획’, 즉 자원의 수요를 예측해서 영리하게 준비하는 활동은 중산층에게 가장 절실하다. 공공부문 또는 대기업에서 정규직인 이들이 주로 포함된 중산층은 미래의 소득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부채에 따른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지도 대략이나마 가늠이 된다. 투자 가치 높은 부동산을 사기 위해, 자녀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물려주기 위해, 그들은 늘 계획을 해야 한다. 근로소득, 혹은 자녀의 제한된 재능과 시간 등의 제약 조건을 엄격하게 따져서 계획하는 데 익숙하다. 실제로 이처럼 계획하는 역량의 차이에 따라, 출신 배경과 학력 및 직업 등이 비슷한 이들끼리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곤 한다. 서점에서 잘 팔리는 재테크 서적이 주는 교훈이다.

반면, 중산층 이하 계층은 또 다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들은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불안을 늘 안고 산다. 비정규직은 언제라도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는 소득이 들쭉날쭉한 상황이 당연하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에게 ‘계획’은 사치다.

지금은 몰락했으나 한때 중산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택이 아들을 향해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고 말하며 짓는 들뜬 표정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계획’은 중산층의 특권인 동시에 무기다. 계획을 하는 아들이란, 기택에게 중산층 재진입의 희망과도 같다. 그러니 표정이 밝을 수밖에.


도무지 정의하기 힘든 중산층

그렇다면, 대체 중산층이란 무엇인가.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의 가정 풍경부터 신문 기사와 페이스북 포스팅까지. 어디서나 사회의 표준으로 통하는 그들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중산층은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의미는 제대로 정의돼 있지 않다. 앞서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쓴 정의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표준국어대사전』을 펼쳐보자. “재산의 소유 정도가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중간에 놓인 계급. 중소 상공업자, 소지주, 봉급생활자 따위가 이에 속한다”라고 정의한다.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흔히 노동자를 무산 계급이라고 한다. “봉급생활자”는 결국 노동자일 텐데,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중간에 놓인 계급”이라니,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봉급생활자의 범위가 워낙 넓은 탓이다. 통계청 일자리 행정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전체 일자리는 2,316만 개다. 이 가운데 임금 노동자는 82.3%인 1,907만 명이다. 이들이 모두 중산층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의한 중산층은 보다 구체적이다. 중위소득 대비 소득이 50~150% 사이인 가구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역시 통념과는 동떨어져 있다.

4인 가구 기준으로 2019년 중위소득은 월 461만3,536원이다. 따라서 4인 가구 월 소득 230만6,768원 초과~692만304원 이하면 중산층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2019년 4인 가구 기준 월 최저생계비는 276만8121원이다. 그렇다면 가구 월 소득이 약 231만 원부터 277만 원 사이인 4인 가정은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이면서 중산층이 된다. 빈곤층과 중산층은 다르다는 게 통념이므로, OECD의 정의도 부적절하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중산층 개념은 실제로 상위 계층에 가깝다. 2018년 아동수당 지급을 놓고 불거진 논란이 잘 보여줬다. 당시 상위 10% 계층은 제외하고 지급하기로 했다. 자신이 당연히 상위 10% 바깥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아동수당을 신청했다가 탈락한 사례가 빈발했다. 체감과 실재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겼던 많은 이들이 실제로는 상위 10% 안쪽이었다. 각각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다니며, 월 합산소득이 세전 기준 1,000만 원인 맞벌이 부부가 있다. 자식이 하나다. 그리고 6억 원대 주택 한 채와 3,500만 원대 자가용이 있다. 통념에 비춰보면, 대체로 중산층으로 여겨질 법하다. 하지만 2018년 당시 정부가 발표한 계산식에 따르면, 이들은 상위 10% 안쪽에 든다.


중산층 착시 현상의 이유 : 중위소득보다 높은 대졸 초임

실제로는 상위 10~20% 계층인데 체감하는 위치는 그보다 한참 아래인 상황. 이런 일이 왜 생겨났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꼽을만한 이유는 중위소득보다 높은 대기업 초임이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의 300명 이상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의 첫해 임금총액이 3만7,756달러(약 3,976만원·2014년 연평균 환율 적용)다. 그런데 같은 해, 일본의 1000명 이상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의 첫해 임금총액은 2만7,105달러(약 2,854만원)였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차이까지 고려하면, 이런 특징이 더 도드라진다. 한국 대기업의 대졸 초임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135%다. 반면 일본은 74.8%였다. 한국의 대기업 대졸 초임이 일본보다 60.2%포인트 높다.

대학을 갓 마친 대기업 정규직 소득이 유난히 높다는 점은 중위소득과 비교하면 더 잘 드러난다. 소득이 높은 순으로 줄 세웠을 때, 가운데에 있는 사람의 소득이 중위소득이다.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금융·임대소득 등을 합친 통합소득 기준으로, 이 값은 연간 2,301만 원(2017년 기준)이다. 그런데 다른 소득이 전혀 없이 그저 근로소득만 있는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이 그보다 훨씬 더 번다. 이는 중위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당연하게 여기게끔 한다. 경제활동 인구 절반이 매달 200만 원 이하를 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소득과 교육수준이 비슷한 이들끼리 어울리는 문화는 이런 특징을 더 강화한다. 중학교를 마치고 인문계와 실업계(특성화고교)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순간, 같은 세대의 다른 한쪽과 인연이 끊어진다. 그 뒤, 대학 진학 여부에 따라 또 갈라진다. 다시 취업 과정에서 가지치기를 한다. 이렇게 인간관계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데, 생애 첫 소득이 중위소득보다 한참 위인 구조까지 겹친다. 실제로는 명백히 상위계층인데 스스로를 중간 계층이라 여기는 착시 현상은 그래서 생긴다.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중간인데, 그 세계 자체가 중간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다는 점은 종종 잊는다.


중산층 착시 현상의 이유 : 기울어진 담론 지형

이는 특정 계층이 사회 전체를 과잉 대표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지난 연재에서도 지적했듯, ‘86세대’라는 표현이 전형적인 예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이들을 가리켜 ‘86세대’라고 하는데, 당시 대학 진학률은 30% 안쪽이었다. 1960년대 생 가운데 대학에 다녔던 이들보다 다니지 않았던 이들이 더 많다. 후자가 전자의 두 배 가량이다. 그럼에도 ‘86세대’라는 표현이 1960년대 생을 대표해서 쓰이곤 한다.

이런 상황은 대학생 취업에 대해서도 함께 적용된다. 대기업, 공공부문 등의 정규직이 되는 경우는 전체 가운데 소수다. 하지만 각종 언론 보도는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대학 진학률이 낮고 대기업 일자리는 폭발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관성이 계속 작동하는 탓이다. 대학을 마치면 으레 대기업에 들어가던 시절에 청년 시기를 보낸 이들이 여론을 주도한다. 초등학교 마치면 당연히 중학교에 가는 것처럼, 취업을 바라본다. 언론사 데스크 입장에서 청년 세대를 보면 자기 세대 경험에 가까운 이들이 주로 눈에 띈다. 대학 마치고 무사히 정규직이 된 이들이 또래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다. 그러나 과잉 대표된다. 그들이 삶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진학과 취업의 궤도를 잘 따라간 소수는 그래서 자신들이 소수라는 점을 종종 잊는다. 여론 주도층이 설정한 표준에 가깝다는 이유로 생겨난 착시 현상이다. 표준이 위쪽을 가리키고 있는 조건에선, 표준에 가까운 집단은 중간이 아니라 상위 계층이다.


중산층 착시 현상의 이유 : 열악한 복지

그리고 짚어야 할 이유는 열악한 공공 서비스다. 월 합산소득이 세전 기준 1,000만 원인 맞벌이 부부를 앞에서 소개했다. 한쪽이 세전 400만 원, 다른 쪽은 세전 600만 원쯤 버는 맞벌이 부부. 각각 중위소득의 2배, 3배를 번다. 그러나 부유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소비 여력이 낮기 때문이다. 사교육비로 큰돈을 쓰고, 불안한 노후를 대비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 탓이다. 이렇게 허리띠를 조이니까, 상위 10% 안쪽인데도, 자신들이 상위 계층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실제로는 상류층인데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오해가 생겨난 한 이유다.

만약 공교육 구조가 달라져서, 사교육비 지출이 줄어든다면, 아울러 노인 복지가 대폭 개선된다면, 이들 부부는 가처분 소득이 확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실제에 가깝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산층 착시 현상의 이유 : ‘하우스 푸어’ 현상

아울러 부동산 문제도 이유로 꼽아야 한다. 집을 순전히 자기 돈으로 사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개는 빚을 내서 산다. 부동산 값이 계속 오르는 상황에선, 빚을 많이 내는 쪽이 유리하다. 이자 비용과 세금의 합계보다 부동산 가격 인상에 따른 차액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전문직,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처럼 직업이 안정적이어서 은행에서 대출받기 쉬운 계층은 빚을 내서 부동산을 사들일 동기가 생긴다. 문제는 빚을 내서 부동산을 산 이들 역시 당장은 지출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대하는 시세 차익은 미래에 돌아오는 것이므로, 이자 비용을 내는 지금은 소비를 줄이게 된다. 이런 부류를 가리키는 ‘하우스 푸어’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했다. 그들은 소유한 자산 규모가 크므로, 가난을 가리키는 ‘푸어(poor)’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훗날 큰 소득을 얻기 위해 지금 소비를 줄이고 있을 뿐인 상위 계층이 ‘푸어’를 자처하는 풍경은 한국 중산층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중산층 진입 기회 축소와 세대 갈등

요컨대 흔히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실제로 중간 계층이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상위 계층이다. 앞서 열거한 여러 이유로 생겨난 착시 현상이 있다.

86세대와 그 아래 세대의 갈등 역시 이런 프레임으로 봐야 설명하기 쉽다. 세대 문화 차이는 부차적이다. 1960년대 생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꽤 높은 확률로 ‘중산층이라 불리는 상위 계층’이 됐다. 대학에 들어갈 때 기대했던 미래 생활수준에 대체로 근접했다. 게다가 이들 세대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에는 과외가 금지돼 있었다. 대학생 가운데 가난한 집안 출신이 지금보다 많았다. 따라서 어지간한 회사원만 돼도, 계층이 상승한 처지가 되는 이들이 흔했다.

반면, 그 아래 세대는 단지 대학에 갔다는 이유로 상위 계층 진입을 기대하긴 어렵다. 대학생 수는 늘어난 반면,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는 그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생 가운데 빈곤 계층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 줄어들었다. 따라서 그저 회사원이 된 것만으로 계층이 상승했다고 느끼는 이들은 전보다 드물어졌다. 대기업에 다니는 부모를 둔 자식이 중소기업 취업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면, 자기가 속한 계층이 하락했다고 느끼기 쉽다.

따라서 아래 세대 입장에선 계층상승이 윗세대보다 어려워졌다고 여긴다. 그런데 정치와 언론에서 설정하는 표준적인 삶은 ‘중산층이라 불리는 상위 계층’에 맞춰져 있다. 대학을 나와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3인 또는 4인 가정을 꾸리는 삶을 중심에 둔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전보다 심해졌다. 198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는 이른바 달동네를 배경으로 삼은 경우가 흔했다. 지금은 고시원에서 지내는 일용직을 주인공으로 둔 문화 콘텐츠가 적다.

‘중산층이라 불리는 상위 계층’ 진입이 갈수록 힘들어진 청년 세대가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어떤 세대에겐 쉬워보였던 중산층 진입이 다른 세대에겐 어려우므로, 세대 갈등이 생긴다.


안철수도 주장했던 보편적 복지, 이젠 다 잊었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우선 ‘착시’부터 걷어내야 한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는 이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상위 계층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 구조적인 이유로 누린 점이 많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을 지금보다 더 많이 져야 한다. 이는 세금을 더 내야한다는 뜻이다. 중산층이 세금을 더 내서, 그보다 낮은 계층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모델. 그게 바로 복지국가다.

한국도 이런 길을 가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던 적이 있다. 2010년 내내 뜨겁게 달아올랐던 무상급식 논쟁이다. 극빈 가정 자녀이건, 재벌 가정 자녀이건 구별하지 않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대편을 압도했다. 이른바 ‘보편적 복지’가 시대정신이 됐다. 그보다 2년 뒤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보편적 복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안철수의 생각』을 다시 펼쳐보자. 이 책에서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는 보편적 복지에 대해 “중산층과 서민이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세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고 복지의 질적 수준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중산층 아이도 급식을 먹는다면 '내가 돈을 더 낼 테니 급식의 질을 높이자' 하겠지만, 가난한 아이들만 급식을 먹는다면 '세금을 내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단가를 낮춰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니 보편적 복지는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을 실감하고 '함께 누리는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체제라고 하겠습니다”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부유층, 중산층, 서민, 빈민이 같은 서비스를 누리게끔 하면, 중산층이 세금을 더 내서라도 서비스를 개선하자는 압력이 생긴다. 서민, 빈민만을 위한 서비스라면, 부유층과 중산층 입장에선 결국 시혜에 불과하다. 장기적으론 예산을 깎는 방향으로 압력이 가해진다.

요컨대 ‘보편적 복지’가 지닌 강점은 중산층과 서민을 한데 묶는 동맹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복지국가동맹’이라는 표현도 자주 나왔었다.

그리고 2019년 지금, 다들 알고 있다. ‘복지국가동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안철수의 생각』에 담긴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을 실감하고 '함께 누리는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체제”라는 표현은 안철수 스스로도 잊은 지 오래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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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시기 연말정산 파동, 문재인 정부까지 발목 잡혀

복지 예산은 꾸준히 늘었지만, 서민과 빈민이 체감하는 복지 서비스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남재욱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이 발표한 글, 「한국 복지국가 성장의 재분배적 함의 : 누가 복지국가로부터 소외됐는가?」는 이 문제를 정확히 짚었다.

중산층을 자처하는 계층이 자신들의 실제 위치에 걸맞은 책임을 회피했다. 상위 10~20%인 그들은 증세를 격렬히 거부했다.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면서 증세를 거부하면, 피해는 서민과 빈민이 본다. 보편적 복지란, 재정의 대폭 확대를 전제한 방식이다. 그런데 증세가 이뤄지지 않으면, 서민과 빈민 입장에선 선별적 복지를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재정이 대폭 늘어나고 복지를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경우, 재정이 소폭 늘어나고 복지를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경우, 재정이 소폭 늘어나고 복지를 선별적으로 제공하는 경우. 이들 세 가지 가운데 어느 쪽이 서민과 빈민에게 유리한가. 답은 세 번째다. 반면, 중산층 입장에선 두 번째가 가장 낫다. 그리고 현실은 두 번째 방향으로 흘러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인 2013년에 벌어진 ‘연말정산 파동’을 돌아보자. 보다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한국은 노동자가 세금을 적게 내는 나라다. 앞서 소개한 부류, 즉 4년제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이나 공공 부문 정규직으로 일하는 부류가 특히 그렇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소득세수의 비중은 4.6%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4%)의 절반 수준이다. 부유층에게 적용되는 최고 세율 자체가 낮은 것은 아니다. 2018년 기준 최고세율은 46.2%다. OECD 평균은 43.9%다.(2016년 기준)

그런데 소득세수는 왜 이토록 적은가. 주로 각종 소득, 세액공제 때문이다. 2017년 근로소득자의 총급여는 634조 원이다. 여기서 근로소득공제(162조 원), 인적공제(53조 원), 특별공제(72조 원)를 거친 과세표준은 347조 원이 된다. 여기에 소득세율을 곱한 1차 소득세수(48조 원)에서 교육, 의료비 등 각종 세액공제가 적용된다. 이렇게 공제된 규모가 13조 원대다. 따라서 최종 소득세수는 35조 원에 불과하다. 실효세율은 고작 5.5%다.

역대 정부가 임시방편 식으로 도입한 각종 공제 제도가 조세 및 재정 구조를 누더기로 만들었다는 지적은 늘 나왔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첫 해에 소폭이나마 개혁을 시도했다. 의료, 교육비 등 소득공제 항목을 세액공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듬해 연말 정산에서 난리가 났다. 돌려받는 세금이 줄거나, 혹은 세금을 더 내야 할 처지가 된 이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당시 야당이던 현 여당과 문재인 대통령도 반대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는 착시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소득공제 항목을 세액공제로 바꿔서 부담이 늘어난 계층은 소득 상위 일부 계층이다. 앞서 거론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상위 계층’이다. 이들의 반발이 과잉 대표되면서, 공제 개혁은 유야무야 됐다.

문제는 결국 계속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당초 2019년 말로 효력이 끝나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혜택을 더 축소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불이 붙었다. 결국 정부가 기존 방침을 뒤집었다. 기획재정부는 2019년 3월 11일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올해 말 일몰 종료(폐지)하지 않고, 연장되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산층 껍질 안으로 움츠러든 민주투사들

복지 담론은 재정이 많이 드는 보편적 복지를 가리키는데, 중산층은 증세를 격렬히 반대했다.

여론은 중산층이 주도하므로, 정부 역시 복지 확대를 비켜간다. 앞서 소개한 남재욱 박사의 「한국 복지국가 성장의 재분배적 함의 : 누가 복지국가로부터 소외됐는가?」는, 그래서 가장 소외된 집단이 ‘저소득 근로연령대 인구’라고 밝혀냈다. 이들은 기초연금 등 각종 현금 복지 혜택에서도 소외됐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난 구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확대, 제조업 위기 등이 겹치면서 일자리 상황이 나빠졌다.

보다 구체적으론, 1960년대 생이면서 대학에 가지 않았던 이들이 주로 해당한다. 분명히 조금씩이나마 복지 수준이 나아졌다. 그러나 그 혜택은 모든 계층에게 똑같이 전달되지 않았다. 1960년대 생이면서 대학에 갔던, 이른바 ‘86세대’는 상대적으로 좋았던 일자리 상황을 바탕으로 쉽게 중산층이 됐지만, 증세에 대해선 격렬히 반대했다. 반면 그들과 같은 시기에 태어나 함께 자랐지만 대학에 가지 않았던, 그래서 ‘8’로 시작하는 학번이 없는 1960년대 생들은 ‘86세대’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해에, 이런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터졌다. 30년 가까이 정규직 기자로 일했던 청와대 대변인이 무리하게 빚을 내서 상가를 샀다. 그의 부인 역시 30년 동안 교사로 일했다. 이들 부부의 순자산은 14억 원대다. 1960년대 생이므로, 대학 진학률이 30% 미만이던 시절에 부부가 모두 대학을 다녔다. 소득, 자산, 교육 수준을 종합하면, 명백히 상위 계층이다. 그런데도 노후가 불안하다고 했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를 강화하는 방식 대신, 건물주가 돼 각자도생하는 길을 택했다.

앞서 한국 중산층이 ‘체리 피커’처럼 굴었다고, ‘얌체 짓’을 했다고 적었다. ‘86세대’가 정치적으로 성장했고, 경제적 안정을 누렸지만, 그들 또래인 ‘학번 없는 60년대 생’들은 그 혜택에서 소외됐다. 10년 전 무상급식 논쟁 당시 달아올랐던 복지국가를 향한 열망은, 증세 없는 복지를 살짝 맛보고는 식어버렸다. 민중의 편에서 민주화와 사회 진보를 위해 싸웠던 많은 이들이, 어느 순간 안온한 중산층이라는 껍질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다들 그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개혁 성향 86세대 중산층 일부의 ‘얌체 짓’은 때때로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한때 정의롭던 이들이 이제는 영리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정부를 이끌 자격과 실력을 이렇게 입증했다.”

성현석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