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서 완전고용은 가능한가?

     
케인스주의 거시경제 정책의 등장과 몰락의 배경엔 완전고용 논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를 시장경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자본주의 경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차이의 핵심은 무엇일까?

보통 자본주의란 말을 쓰는 건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라는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둔 것이다. 노예제는 노예주와 노예, 봉건제는 영주와 농노, 자본제는 자본가 혹은 고용주와 노동자가 생산관계의 중심이다. 그리고 노예주와 노예, 영주와 농노가 그렇듯이 자본가·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명령과 위계의 수직적 권력 관계란 것을 전제한다. 노예제와 봉건제가 폭력과 신분제라는 경제 외적 강제에 근거한 것인데 비해, 자본제는 해고 위협이란 경제적 강제에 근거한 것이란 차이만 있을 뿐 수직적 권력 관계란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시장경제론은 고용주와 노동자의 고용계약 관계를 수평적 거래 관계로 본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서 거래가 이뤄진다. 어느 한 쪽이라도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할 것이고 거래는 중단된다. 이런 거래에서 수직적 권력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시장의 경쟁 정도, 독점 정도에 따라 교섭력 차이는 있지만 거래 조건이 불만인 측은 언제든지 거래를 파기할 계약의 자유가 있다. 노동 시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없다. 더욱이 완전경쟁 노동시장이라면 수직적 권력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노예와 농노는 이직의 자유가 없지만 시장경제의 노동자는 고용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용 계약을 중단하고 직장을 떠날 자유가 있다. 그러니 시민 혁명 이후 거주·이전의 자유, 계약의 자유를 얻은 노동자는 노예, 농노와 달리 자본가·고용주와 수평적 거래 관계를 맺는 자유 시민이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용된다는 건 회사 사장,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가 수평적 거래 관계가 아니라 명령과 복종의 수직적 권력 관계란 것은 상식이다. 물론 노동 조건이 열악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굴욕적인 명령·복종을 요구하는 경우 노동자는 이직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현재와 비슷하거나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낮다면 이직의 자유가 있어도 실제로 이직을 선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노동자가 사표를 써도 비슷한 노동 조건의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거나 사회복지 제도의 도움으로 비슷한 조건의 일자리를 찾는 동안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면 이직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자본주의 고용의 수직적 권력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해고 위협이라는 경제적 강제 기능은 무력화된다.


자본주의 고용의 수직적 권력 관계를 유지하는 궁극적 힘의 원천은 해고 위협이다. 고용계약을 중단하는 기업가의 해고와 노동자의 이직이 대칭적이라면 수직적 권력 관계는 무너지고 수평적 거래 관계가 된다. 사과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와 다를 게 없어진다. 노동시장에서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고용 상태라면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 조건과 부당하고 굴욕적 명령에 대해 과감하게 대항하거나 이직을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완전고용에 가까워져 임금이 상승하고 이윤율이 하락하면 노동절약적 기술이 선택되고 노동수요가 감소해 산업예비군이라는 비자발적 실업이 항상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봤다. 완전고용에 근접하거나 사회복지 확대와 사회안전망 확충으로 노동력이 탈상품화하면 자본주의 수직적 고용관계가 약화되어 자본주의 수익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완전고용과 사회복지를 확립하는 것은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혁명의 방법 외에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개량적 방식으로 수직적 권력 관계인 자본주의 고용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이 18~19세기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이었고 완전고용과 사회복지 정책을 추구하는 사민주의는 한동안 비현실적 개량주의로 비난받았다. 사민주의 정책이 20세기 뉴딜 개혁 이후 일반화되었지만,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이런 개혁이 가능한 것인가를 둘러 싼 수많은 논쟁을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케인스 이전 고전파 경제학은 임금의 신축적 조정을 통해 노동 수요과 공급이 일치하는 균형이 성립하기 때문에 비자발적 실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따라서 현실의 실업자는 모두 노동시장 균형 임금 보다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자발적 실업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케인스는 유효수요가 부족한 경우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하며 임금 하락은 소비수요를 감소시켜 불황을 오히려 심화시킬 뿐이며 이 때는 정부 지출을 늘리는 수요 확대 정책을 써야 실업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케인스 초기에는 우파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이 케인스 경제학을 빨갱이 경제학쯤으로 취급했다. 현실 정치에서 우파와 기업가들이 케인스주의 완전고용 정책에 반대한 것은 완전고용이 임금을 상승시키고 기업 이윤율을 낮출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인스주의 처방이 불황을 극복하고 실업을 줄이는 실질적 효과가 있었고 1950~70년대 케인스 경제학은 거시경제학의 주류가 된다.

그러나 케인스주의 완전고용 정책은 성과와 함께 한계도 갖고 있었다. 실업을 줄이기 위해 확장재정정책과 금리를 낮추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강하게 쓸 경우 인플레이션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완전고용 추구를 위해서 인플레이션을 어느 수준까지 감당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총수요 확대 정책이 인플레이션만 악화시킬 뿐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통화주의와 신고전파 경제학이 득세하면서 케인스주의 완전고용정책은 몰락한다.


여기에 대해 사뮤엘 보울스같은 좌파 경제학자는 케인스주의 완전고용정책의 좌절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우파가 완전고용을 기피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때문이라고 하지만, 핵심은 임금 상승에 의한 이윤 압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1990년대 미국 고용률(경제활동참가자 대비 취업자 비율)과 이윤율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S. 보울스, 『자본주의 이해하기』, 후마니타스, 576쪽). 고용률이 95% 아래인 경우에는 고용률이 증가하고 실업률이 내려갈 때 기업 이윤율이 올라간다. 그러나 고용률이 95%를 넘어서면 고용률이 증가하고 실업률이 감소할수록 이윤율이 하락한다. 고용률이 95% 수준 아래에서는 경제활성화로 고용이 증가하면 기업 이윤도 증가하지만, 고용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임금이 급속히 상승하고 노동통제가 어려워져 이윤율이 오히려 하락하는 이윤 압박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칼레츠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고용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본 이유가 이것이다. 이윤 압박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완전고용에 근접하면 기업 이익과 경제를 중시하는 정치인들이 완전고용정책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케인스주의 정책가들은 고용률이 95%를 넘어섰지만 노동자 상황은 여전히 완전고용이 아니라고 봤고 완전고용 달성을 위해 총수요 확대정책을 계속 폈다. 기업은 임금 상승을 제품 가격 상승으로 전가시키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화되었고 이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쇠퇴로 경제성장은 둔화되었다. 보울스는 이것을 케인스주의 완전고용정책이 몰락한 이유라고 보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들의 인플레이션율이 0~1%대에서 진행되는 현상이 일반화되자 완전고용정책에 대한 요구가 다시 거세지고 있다. 완전고용을 둘러싼 거시경제정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매우 정치적이고 계급적 문제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거시경제정책과 재정정책을 몇 회에 걸쳐 다뤄볼 계획이다.

조영철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