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비참한 내전(內戰)이다

     

지금 한국은 ‘전쟁’ 중이다. ‘공정성’을 두고 벌어지는 여론의 전쟁. ‘공정성 전쟁’은 권력자·기득권층만 겨냥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향해서도 무차별적으로 일어난다. 만약 공정성 전쟁이 권력자와 기득권층을 향해서만 벌어졌다면, 나는 그것을 ‘공정성 혁명’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 역시 쓰이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글이 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벌어지는 공정성 전쟁들은 기득권 지배 구조를 뒤집어엎는 ‘혁명’이 아니라 기득권 질서의 공고화로 가는 ‘내전’이다. 결국 우리 대다수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전쟁이란 뜻이다. 물론 공정성 전쟁으로 타격받은 기득권자·권력자는 있었고 앞으로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는 한, 단언컨대 ‘20대 80’ 혹은 ‘1대 99’의 불평등 구조에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 왜 그러한지, 그럼 구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재를 진행하면서 차차 설명할 예정이다.

이 글의 일차 목표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공정성’ 담론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서 거기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다. 물론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된다 해도 공정성 ‘전쟁’이 공정성 ‘혁명’으로 전환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래전 혁명가들과 달리 우리는, 은폐된 이념의 폭로가 곧바로 거대한 사회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마인드셋(mindset)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작업은 중요하며 또 필요하다. 그 작업은 고독한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말을 섞고 논쟁하는 커뮤니케이션 실천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작은 파문일지언정 그 자체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전’의 현장들

다음은 공정성 내전의 전형적 사례다.[1]

서울교통공사 소속 무기 계약직들이 정규직 직원들로부터 원색적 비난과 인신공격에 시달린 끝에 급기야 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서울시가 약속한 정규직 전환정책이 구체적 계획 없이 표류하면서 지난달 무기 계약직 한 명이 목숨을 끊는 등 극단적인 노노 갈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중략) 교통공사 내부 게시 망에서부터 무기 계약직을 향한 정규직의 온갖 욕설 글과 비하 발언을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의구현, 무임승차 놈들아”, “무임승차 무기업무직들은 조져야 된다”는 등의 격한 발언은 양호한 편이다. 무기 계약직을 ‘빨갱이’나 ‘통합진보당잔존세력’으로 지칭하면서 “평양교통공사로 꺼지라”며 뜬금없는 이념 공세를 펼치는 글도 보인다. “수십 년간 메트로와 함께한 노숙자랑 잡상인은 편입 안 시키느냐”라거나 “폐급을 폐급이라고도 부르지 못하느냐” 등의 인신공격성 표현도 상당하다.[2]

2017년 12월 31일 서울교통공사 노사가 무기 계약직 전원을 정규직 전환하기로 최종 합의하자,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디 ‘베리굿띵’은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미쳤네요’라는 게시물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규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구직자는 외면하고 어중이떠중이 뒷문으로 채용된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되고. 이게 적폐 청산인지 적폐 양산인지 도대체 누가 적폐인지. 서울시장 실적을 위해 적폐를 양산하는 것인 양 한심하네요.”[3] 그 글에 수많은 동의 댓글이 달렸다.

“미친 거죠. 이건 평등이 아니라 특권입니다.”(아이디 ‘처리스’)
“매점 아줌마도 대졸 공채로 입사해서 머리 아픈 일하는 직원들하고 똑같은 급여 받는
거죠. 공산주의스러운 발상이죠.” (아이디 ‘onenb2’)
“심하게 말하면 출신성분 자체가 다른데 같은 급여 주는 거임. 무기 계약이랑 공채가
급여체계와 일이 다른 건 당연한데 이걸 합치면 분위기 개판에 구직자들 허탈감도 쩔
죠.”(아이디 ‘사이드메뉴’)

저런 발언들은 특별히 예외적이거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의 단골 메뉴는 ‘무임승차론’과 ‘역차별론’이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정규직은 힘들게 대학 가서 어렵게 정규직 공채시험을 통과한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반해 비정규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므로 설사 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처우를 차별하는 게 당연하다는 게 이들 생각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업무경력이 오래되었다는 이유 따위로 정규직이 되면 그건 ‘무임승차’이며 능력자·노력가를 억울한 피해자로 만드는 ‘역차별’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피해자들이 그렇게 양산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서만이 아니다. 소수자·약자 배려 정책이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어느 대학교에서 벌어진 논란에 관한 기사다.

개강 첫날이었던 지난달 2일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 강의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학생 A(여·20)씨가 강의실의 ‘높은 문턱’에 고개를 떨궜다. 입구에 계단이 있어 A씨 혼자서는 강의실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강생 두 명에게 휠체어를 들어 올려 달라고 부탁해 간신히 강의실로 들어갔지만 상황은 더 난감했다. 강의실 좌석이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교수가 서 있는 강단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수업을 들었다.
이 대학은 ‘장애인 접근이 어려운 강의실 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A씨는 이 리스트를 보고 수강 신청을 했다. 그런데 이 강의실이 리스트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A씨가 학교 장애학생지원센터에 강의실 변경을 요청하자 학교 측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곳에서 350m 떨어진 다른 강의실을 배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부 수강생이 “동선(動線)을 고려해 수업 시간표를 짰는데 강의실 거리가 멀어지면 곤란하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대신 담당 교수가 “장애 학생이 이동 시간 때문에 수업 앞뒤로 빼먹는 부분에 대해 따로 보충 수업해주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며칠 뒤 A씨는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양심 민폐 장애인’이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썼다. ‘장애 학생 하나가 미리 알아보지도 않고 수강 신청해놓고 강의실 변경 요구했다가 무산됐다. 걔만 따로 일대일 수업 받는다는데 이거 어디다 항의하냐’는 글과 함께 ‘특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교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데 1:1로 보충수업을 해주는 것은 불공평하다’ ‘양심이 있으면 장애 학생이 수업을 포기해야지’라는 글도 올라왔다.
이번 사태를 두고 학내에선 의견이 갈렸다. 재학생 최 모(21)씨는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학생의 편협한 시각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지가 4일 이 대학 재학생 20명에게 물어보니 60%가 ‘보충수업은 특혜’라고 답했다. 재학생 박 모(21)씨는 “학점을 상대평가로 주는데 일대일로 개별 수업을 하다 보면 중요한 부분만 이야기해줄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강의실 변경을 해줘선 안 된다’는 답변도 40%였다.(하략)[4]

이 기사를 두고 ‘배려심 없는 요즘 이기적인 대학생’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게 나왔고, 같은 세대 대학생으로서 반성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계단강의실을 고집한 학생들, 게시판에서 거기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에게 저 사건은 배려나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성’의 문제였다. 단지 장애인 한 명 때문에 모든 사람이 피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건, 그들이 보기에 납득할 수 없이 불합리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죽어라 공부해서 천문학적 등록금까지 내고 들어온 대학교에서 내가 누릴 권리를 다 누려도 시원찮을 판에 왜 내가 그런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 “애초 계단강의실임을 확인하지 않은 장애인이 문제인데 절차상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왜 ‘양보’해야 하나. 그거야말로 ‘불공정’하지 않은가?”


한국인은 왜 공정성에 민감해졌을까

평창올림픽이 한창이던 2018년 1월, 정부가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남북단일팀으로 꾸리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첫 반응은 ‘어리둥절’이었지만 곧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밀어닥쳤다. 반대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정치적 결정 때문에 오랫동안 올림픽을 준비한 우리 대표선수가 출전 기회를 잃게 되는 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선수들에게 희생을 강요 말라”며 격렬히 반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마 정부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좋은 취지로 하는 일에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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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들은 청년 세대 반응에 주로 방점을 찍었다. 그들이 소셜 미디어 등에서 활발히 발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정부에 반대하는 청년 세대’라는 틀로 본 기사가 많았다.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가 통일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라는 분석, 청년 세대가 ‘공정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유명인들도 TV에 나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작가 유시민 씨는 제이티비시(JTBC) ‘썰전’에 출연해 “북한과 얽힌 것도 없고 자유롭게 자란 청년 세대에게는 국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중요하다”며 “젊은 세대의 공정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되게 좋은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유시민 씨의 저 발언은 유독 신선했다. 왜냐하면 그가 10여 년 전만 해도 청년 세대에게 지극히 냉소적이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던 2005년, 유시민 씨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대학생들의 정치 참여가 낮은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인생인데 참여하지 않아서 10년 후에 사회에 발언권이 없으면 그 또한 정당한 것이고 참여를 많이 해서 이후에 사회를 주도하게 되면 그 또한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참여하지 않으면 나중에 발언권이 없으니 알아서 하시기 바란다.” 같은 자리에서 청년 실업과 관련해 이런 말도 했다. “내가 하는 정치는 되도록이면 원칙적으로 가치실현을 위한 정치지, 누군가를 위한 정치는 안 한다. 취업에 관한 책임은 각자가 지는 거다.”(‘유시민 청년 실업 발언 논란 확산’, 『프레시안』)

‘대학생 때 정치 참여를 하지 않으면 10년 후에 발언권이 없어지는 게 정당하다’는 발언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의 발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청년기 정치 참여 순서대로 발언권이 나뉘어 지급되는 사회라니, 흡사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소설의 한 구절 같다. ‘취업에 관한 책임은 각자 지는 것’이라는 발언은 ‘각자도생’의 시대정신 또는 개인 소신의 발로겠다.

어쨌든 지금 청년 세대가 ‘공정성’에 특별히 예민하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그런데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에 비해 ‘공정성’에 유독 예민하다는 것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시민 씨가 말하듯 “되게 좋은 것”일까?

확실히 해두자. ‘공정성’에 예민한 집단은 청년 세대만이 아니다. 물론 청년 세대가 ‘공정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로 보인다. 최근 한국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객관식 평가가 공정하기에 선호한다’는 청년들이 기성세대보다 도드라진다. 그러나 차이가 그리 엄청난 건 아니다. 기성세대 역시 ‘공정성’에 극히 민감하지만 다른 가치(‘평화’ 등)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인식의 차이는 ‘공정성’에 예민한가 여부보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에서 발생한다. 과거 남북단일팀에 모두가 열광했지만 지금은 남북단일팀에 부정적인 기성세대들도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로도 나타났다.

오늘날 청년 세대 뿐 아니라 한국인 절대다수가 공정성이라는 가치에 극도로 예민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생들에게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결정에 분노했던 이유에 대해 쓰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수렴됐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 사회에서는 작은 차이가 생존과 탈락을 가른다. 공정성에 극도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이스하키 선수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기에 분노한 것이다.” 취업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 세대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기성세대 역시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유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쉽게 결론 내려버리지 말고 다시 꼬리를 물고 질문해보자. 오늘의 한국인 말고, 어제의 한국인들은 안 그랬을까? 한국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예를 들어 최순실 딸의 그 유명한 발언 “니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에 대오 각성하여 ‘공정성’을 이 시대의 화두로 삼게 된 걸까? 그럴 리 없다. 시대별로 부침은 있었으되 우리 한국인은 조상 대대로 ‘공정성’에 목숨 거는 ‘공정의 민족’이었다. 우리가 이토록 집착하는 공정성은 단지 최근의 사회경제적 조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징글징글하게(?) 오래되고 깊은 역사적 맥락들이 존재한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본문에 인용된 두 개의 사례를 포함해, 앞으로 연재될 글 상당 부분에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한국 능력주의의 형성과 그 비판』(박권일, 2017)을 발췌·인용하게 될 것이다.
[2] 송영훈, 「'폐급 XX, 공산당'…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 인권위에 진정」, 『노컷뉴스』, 2017.12.7.
[3] 베리굿띵,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미쳤네요」, ‘엠엘비파크’ 불펜 게시판, 2018.1.1.
[4] 김민정, 「휠체어 학생에…계단강의실 고집한 대학생들」, 『조선일보』, 201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