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상품의 탄생, 8.3 인민소비품

     

8.3 인민소비품운동은 계획경제의 영역 밖, 비교적 자립적인 영역에서 유연한 노동계층을 형성시켰다. 역설적으로, 이 계층은 1990년대의 극단적인 경제난 속에서, 극도의 내핍을 견뎌낼 수 있는 주역이 된다.

1. 상품-화폐 관계의 부활

상품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을 둘러싼 일반적인 삶은 상품의 매매로 지탱된다. 상품은 노동생산물이 사회화된 형태이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 또는 가족들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다. 상품 가치는 타인을 지향해야 한다. 즉, 사회적 가치여야 하며, 가치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완벽히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인 북한은 상품도 사회주의적이다. 이윤 동기가 탈색되고 계획적 생산과정을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한 상품은 등가표가 붙어, 예정된 화폐와 만나야 한다. 그런데 1980년대 북한에서 새로운 상품이 등장했다. 8.3 인민소비품이다. 그것은 볼 품 없었다. 거창하지 않았다. 양적으로 부족하고 질적으로 조악했다. 주제넘게도 거대한 중앙집권적 생산조직 바깥의 작은 무정부적 공간에서 ‘화폐적 이익’을 목적으로 태어났다. 8.3 인민소비품은 잠자는 공주인 ‘화폐’를 깨워 줄 ‘왕자’였다. 만약 이 운동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북한은 1990년대의 어느 한시기,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며 급속히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은 북한에 비사회주의적 풍조를 살짝 주입함으로써, 1990년대의 급속한 환경변화가 체제 붕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한 예방주사였다.

1980년대부터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은 누적되고 있었다. 북한의 대내외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았고, 피로감은 쌓여가고 있었다. 급기야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였다. 북한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자연 재해가 닥쳤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 곳은 없었다. 1994년 위대한 수령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무렵 배급제도 와해되고 있었다. 기나긴 ‘미공급기’가 닥쳐왔다. 계획 부문의 거대한 공장들이 멈춰 섰다. 그나마 주민들의 생명선을 연장한 것은 ‘8.3’의 경험이었다. 생존을 위해 주민들은 온 힘을 다했다. 국가는 ‘자력갱생’의 구호만을 복창하게 했다. 국가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약해졌다. 주민들은 텃밭을 일구었다. 시장은 확장되었다. 장사, 도둑질, 밀수 등 무엇이든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화폐유통은 급속히 팽창했다. 이중적 화폐 유통질서가 허물어져 갔다. 현금유통이 점점 늘어났다. 국영기업의 신용대출이 통화 공급의 기제가 되었다. 화폐가 점점 흘러넘쳤다. 경제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주민들의 삶도 촛불처럼 여위어갔다.


2. 자본주의적 상품의 맹아, 8.3 인민소비품

상품은 사적 생산의 고유한 범주이다. 상품은 사적 소유의 사회적 관계를 물상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가 사라지면 상품도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이다. 사적 생산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상품은 남아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은 상품과 화폐가 남아있는 이유를 ‘소유권’에서 찾는다. 북한에도 국가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가 있고, 소비품에 대해서는 개인적 소유도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소유 주체 간의 교환대상은 상품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상품에는 차이가 있다. 김정일은 그 특징을 3가지로 언급했다. 첫째, 사회주의 상품은 이윤 목적이 아니라 주민의 복리를 위해 생산된다. 둘째, 상품의 범위가 제한된다. 즉, 주로 소비재와 일부 생산수단에 국한된다. 셋째, 계획적으로 생산된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 등 경제생활의 모든 분야가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계획된다.

이 기준은 사회주의 상품이 가져야 할 조건이다. 그런데 이를 바꾸어 말해, 북한에서 어떤 상품이 이윤을 목표로 생산되거나,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계획의 영역 밖에서 생산된다면, 사회주의적 상품이 아닌 것이 된다. 8.3 인민소비품이 그것이다.

3대혁명전시관에서 진행된 평양시 8월3일인민소비품전시회11


3. 1980년대의 정체와 피로

1970년대의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국’ 건설이 완료되었음을 공식화하면서도 선진기술 및 외자 유치를 모색하였다. 국내의 필요성과 1971년 데탕트의 영향으로 서방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내포적 공업화’(Intensive Industrialization)를 추진했다. 1972년부터 서방 선진국가와의 무역을 확대하고 차관을 도입하는 등 자립경제 노선을 완화했다. 그러나 북한의 차관 및 무역 확대 시도는 대규모의 무역적자 급증으로 외채 문제를 발생시켰다. 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비철금속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북한의 수출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1974년 대서방 무역적자는 북한 총무역 적자액 6억 6,700만 달러의 약 80%를 차지했다. 북한은 서방국가로부터 차관도입을 전면적으로 중단했다. 1976년이 되었을 때, 채무불이행 사태(default)를 맞았다. 북한은 수출확대를 통해 외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생산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수출확대ㆍ수입축소 정책은 곧바로 한계에 직면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도 북한의 경제 여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1950년대 확충한 사회기반시설은 노후했고, 기간산업의 설비ㆍ기계 등도 교체가 시급했다. 체제경쟁을 위해 유치한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대비하여 대형 건축물과 주거시설 등도 신축해야 했다. 북한은 경제 부문의 정체를 해방 이후 지속되어 온 ‘혁명적 군중 노선’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혁명’에 대한 피로는 이미 누적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집중적인 대중운동을 강행했다. ‘80년대 속도창조운동’과 ‘200일 전투’ 등 수많은 캠페인이 발기되었다.

1980년대는 사회주의권이 점점 성세(盛勢)를 잃고, 개혁ㆍ개방의 ‘수정주의’ 바람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다. 대외교역이 위축되고 수입이 여의치 않아지자, 내부에서 자원을 동원해야 했다. 오랫동안 강행해온 중공업 우선의 발전전략은 자원 배분을 왜곡시켰다. 군수산업 등의 비대화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소비를 희생시킨 결과였다. 주민들의 소비생활은 양적, 질적 측면 모두에서, 질곡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부예비는 고갈된 상태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은 ‘8.3 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발기한다. 어려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8.3 인민소비품생산운동은 1984년 8월 3일, 평양에서 열린 경공업제품 전시회를 방문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생산조직은 각 공장ㆍ기업소 내에 가내작업반이 맡았다. 원료는 기업의 부산물, 폐기물, 지방 차원에서 모은 유휴원료 등을 활용했고 생활필수품을 생산했다. 판매는 기존의 상업기관이 아닌 ‘8.3직매점’을 설립하여 담당하게 했다. 생필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진행시킨 소비품 생산증대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각 기업ㆍ가정은 ‘생활필수품 직장작업반’, ‘가내작업반’, ‘부업반’ 등을 조직했다. 1989년 6월부터는 ‘8.3 인민소비품생산 모범군’ 칭호를 제정해 이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도왔다. 운동은 북한 전역에 확대되었고, 북한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상 소비품은 8.3 인민소비품 생산단위들이 책임지게 되었다.

최근 우리 당은 인민들의 늘어나는 물질 문화적 수요를 원만히 보장하기 위하여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발기하고 이 운동에 광범한 군중이 참가하도록 하였습니다.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은 군중적으로 내부예비를 효과적으로 동원리용하고 그들의 창발성에 의거하여 여러 가지 인민소비품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이게 하는 폭넓은 대중운동입니다. 우리 당에 의하여 발단된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이 시작된 이후 지난 몇 해 사이에 전국적으로 8월3일인민소비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작업반과 소비품생산자 대렬이 급격히 확대되고 소비품의 량과 가지수도 획기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을 계속 힘있게 벌려 여러 가지 질 좋은 인민소비품을 더 많이 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김정일, “경공업혁명을 철저히 수행할 데 대하여”(1990.6.2)
8.3 인민소비품 생산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자격 제한은 없었다. 소속에 관계없이 읍ㆍ노동자구ㆍ동ㆍ리 사무소에 등록만 하면 자격을 얻었다. 등록 후에는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이렇게 해서 받은 허가증을 소속 공장ㆍ기업소ㆍ협동농장에 제시하고 출근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면 8.3 인민소비품 생산단위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곧이어 운동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8.3운동은 가내에서 소규모로 생산하여 판매하는 무등록 개인수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계획 밖의 생산, 독립적인 판로는 개인적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러한 비사회주의 현상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을 조직운영하고 가내편의 봉사사업을 벌린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되살아나지는 못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자본주의가 되살아 날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없습니다. 가내작업반, 부업반 성원들과 가내편의 봉사원들이 8월3일인민소비품을 생산하여 실현시키는 과정에 수입을 좀 많이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기의 로동의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을 조직운영하고 가내편의 봉사사업을 벌리는 과정에 일부 사람들 속에서 지나치게 많은 수입을 얻고 개인 리기주의를 부리는 현상을 비롯하여 부정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사상교양사업을 잘하고 해당한 경제적 조치를 취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동신문』1990년 9월 7일.
김정일은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다. 8.3생산방식은 더욱 비사회주의적으로 치달았다. 개인들이 공장ㆍ기업소의 원ㆍ부자재를 빼돌려 생산ㆍ판매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8.3인민소비품 직매점에서 다량으로 물건을 구입하여 농촌에 나가 2~3배의 높은 가격으로 팔아 중간이익을 취하는 등 불법적인 상행위도 일어났다. 벌이가 좋아지자, 주민들은 아예 직장에 매월 얼마간 돈을 내고 8.3노동자로 등록했다.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노동규율은 조금씩 이완되고 있었다.

제28차 전국인민소비품전시회 개막-3

4. ‘8.3 인민소비품운동’의 의의

‘8.3 인민소비품 생산운동’은 몇 가지 획기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로 8.3생산의 조직적 측면이다. 8.3조직은 사회주의적 생산체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조직하는 생산체제였다. 둘째는 중앙계획 이외의 영역에서의 생산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생산과 유통과정에 이윤동기가 개입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북한의 전일(全一)적인 경제 구조 하에서는 매우 혁명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8.3 인민소비품이 자본주의적 성격을 갖는 ‘상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의 계획(명령)경제 밖에서 무정부적으로 생산된 8.3 인민소비품은 타인의 효용을 지향했다. 즉, 시장을 지향했던 것이다. 상품은 주민들의 구매의사와 필요를 반영하여 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폐유통, 현금유통이 확대되었다. 시장생산, 즉 상품유통이 확대될수록 더욱 많은 화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계획경제하에서 생산되는 ‘상품’에서 화폐는 ‘교환권’의 의미로 축소되어 있었다. 8.3 소비품에 이르러서야 상품생산과 유통이라는 상품생산사회의 원리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3 인민소비품운동은 계획경제의 영역 밖, 비교적 자립적인 영역에서 유연한 노동계층을 형성시켰다. 역설적으로, 이 계층은 1990년대의 극단적인 경제난 속에서, 극도의 내핍을 견뎌낼 수 있는 주역이 된다. 김정일이 8.3 운동의 비사회주의적인 측면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그의 ‘과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의 유화적 태도는 1990년대의 풍전등화 속에서 북한을 급속한 안으로부터의 붕괴, 즉 내파(implosion)로부터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했다.

민영기 /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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