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통념은 왜 중요한가

     

그람시가 의식이나 문화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물적 토대만큼, 때로 그 이상으로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관념론자’니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라 공격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관점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적 현실만이 중요하며 이데올로기나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 따위의 주장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공정성’ 담론은 무엇이 공정하고 공정하지 않은지를 구분·규정하는 대중적 통념이다. 그런데 이런 대중적 통념을 분석하는 일이 왜 필요하며 중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담론 분석에 앞서서, 조금이나마 그 의의를 설명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를테면 ‘공정성’이나 ‘평등’ 같은 머릿속 관념을 논할 게 아니라, 실재하는 경제적 불평등 자체를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야!” 얼핏 맞는 말 같아 보인다. 이런 주장은 ‘운동권 뉴비’들이 자신의 선명성을 과시하려고 종종 꺼내드는 레퍼토리다. 그런데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시장주의 우파들도 그런 얘길 한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정식,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를 인용하며 ‘강남좌파’를 비난하는 우파도 있다. 부자·강자가 빈자·약자를 위한다는 건 거짓이며 위선이라는 거다.

현실이 중요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은 모두 유물론자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송곳』의 대사도, 결국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의 응용판이다. 얼음송곳 같은 이 유물론의 서늘함에 압도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많지만 20세기, 19세기엔 더 많았다. 하지만 저 말을 명백한 진리라 여기고 사고를 멈추는 순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과거에 ‘기계적 유물론’ 또는 ‘속류 결정론’이라 불린 어떤 주장들이 있었다. 그것은 갖가지 형태의 관념론들, 예컨대 인간의 의지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의지주의, voluntarism)를 제법 날카롭게 공격하면서도 문제를 교정하지는 못했다. 문제의 원인을 하나로 귀결시키는 환원론이라는 점에서 둘은 거울상처럼 동일했기 때문이다.

존재와 의식, 혹은 이데올로기와 물적 토대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숙고해왔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중층결정 개념 등을 통해 역사 유물론을 다시 사유한 루이 알튀세르가 대표적이다. 알튀세르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왜 경제 환원론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론적으로 파고들었던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경제만이 최종심에서 결정적’이지만, 최종심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알튀세르 이전에, 몇몇 혁명가들은 경제 환원론의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이 문제에 있어 가장 과감하고도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이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그람시가 활동 중 체포되자 공안검사는 “이 자의 두뇌를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람시의 저술 활동은 대부분 감옥에서 이뤄지게 된다. 그것을 편집한 책이 바로 『옥중수고(The Prison Notebooks, Quaderni del carcere)』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통찰

그람시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 모순이 격화되어 자동적으로(필연적으로) 혁명이 발발할 거라는 좌파들의 기대가 전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사실만 봐도 그랬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론을 통해 현실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럴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론을 바꾸기보다 현실을 이론에 끼워 맞추려 한다. 즉, 현실을 왜곡하거나 부정해서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한다. 그것은 이성(reason) 차원에서는 부당해도 합리성(rationality) 차원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보통 ‘이성적’이라는 말과 ‘합리적’이라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두 개념은 다르다. 여기서 이성과 구별되는 합리성 개념은 사익추구 및 합리적 선택이론과 관련이 있다.[1] 신념체계를 지탱하는 이론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것은 자기 과거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 반면, 새로운 현상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진다. 이론을 현실화하는 것보다 현실을 이론화하는 쪽이 주목 자원(attention resource)의 소모도 적다. 이성적이지 않지만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뛰어난 혁명가가 으레 그러하듯, 그람시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교조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에 현실을 통해 이론을 다시 궁리했다. 이토록 착취당하는데 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지배자들의 탄압이 두려워서? 모든 지배집단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본격화하면 가혹하게 진압하기 마련이다. 러시아나 다른 나라나 이 점에서 별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인민은 혁명으로 나아갔고 다른 나라 인민은 그러지 않았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그람시는 기존에 존재하던 지배와 저항의 방정식에 뭔가 다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배 집단이 언제나 강압적인 폭력만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 요식 행위라 할지라도 피지배 집단의 ‘동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노새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가끔 당근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지배자 스스로가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의에 기반한 지배 체제, 그람시 특유의 ‘헤게모니’ 개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지배자의 정당성과 피지배자의 동의가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곧, 의식이나 이데올로기 또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함을 의미했다. 물론 최종적 문제, 바꿔야 할 현실이 경제임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람시는 계급적 이해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이미 이데올로기가 ‘인식의 틀’로 작동해 버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그 자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그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차별적 제도가 존재함에도 차별이라는 인식 자체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제도의 개선은커녕 문제제기나 공론화조차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람시가 의식이나 문화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물적 토대만큼, 때로 그 이상으로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관념론자’니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라 공격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관점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적 현실만이 중요하며 이데올로기나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 따위의 주장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는 오직 ‘최종적인 뜻에서’만 역사의 원천일 뿐이라는 엥겔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실천철학에 관한 그의 두 편지에 실린 말이며, 이 편지들은 이탈리아어로도 발행되었다). 이 말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있는, 인간이 경제세계에서의 갈등을 의식하는 것은 이념의 수준에서라고 하는 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다.[2]
그람시가 직접 서술한 이 대목에 대해서 『옥중수고』의 영어판 편역자들(조프리 노웰 스미스 등)은 다음과 같은 보충설명을 붙여두었다.

블로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에 따르자면, 역사에서 결정적인 운동은 궁극적으로 실제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마르크스도 나도 이것 이상으로는 단언한 바가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문장을 왜곡하여, 오직 경제적 운동만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는 그것을 무의미하고 추상적이며 불합리한 문장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두 개의 편지는 실상 모두 사이비 마르크스주의 환원론(그람시도 공격한)의 정정을 의도한 것이었다.[3]
그람시와 마르크스를 길게 인용한 것은 그들의 권위에 올라타기 위해서가 아니다(좌파가 쇠락한 시대에 이들에게 무슨 권위가 남아 있을까). 또한 ‘공정성’이나 ‘평등’의 대중적 통념을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는 분명 오류가 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천착한 최종 목적이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람시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르지 않았지만, 정작 그의 비범성은 따로 있다. 헤게모니와 대항 헤게모니 등의 개념을 통해서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안에 내재되었으되 괄호 처져 있거나 억압되어 있던 ‘주체(화)’라는 영역에 해방적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는 착취의 경제 관계만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적 성격’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으로 이어질 교량을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은 내전(內戰)이라는 국면이 제거된 칼 슈미트의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전제하는 클로드 르포르와 샹탈 무페의 것에 가깝다. 오늘날 개인 각자가 미디어가 되어 자유롭게 떠들어대는 ‘표현 대중’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과 자본 권력의 독점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중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다시 들여다볼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대성, 사회적 상상, 그리고 도덕 질서

근대성(modernity) 연구의 관점에서도 공정성 담론 분석은 의의를 지닌다. 한국의 공정성 담론은 하루아침에,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경쟁이 격화되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할 테지만, 공정성 담론에서 핵심 중의 핵심은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 이념이며, 그것은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몇몇 사회에서 내용적으로 선취된 근대성이었다.

그 근대성의 대표적인 형식은 오직 옛 한국, 베트남, 중국 땅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관료선발방식인 과거 제도다. 이는 서구보다 먼저 일어난 근대성이었기 때문에 단수형 근대가 아닌 복수형 근대(“modernities”)로 쓰기도 한다.[4] 근대성이 착근된 역사적 ‘기원’을 밝혀내고 그 ‘발전’ 과정을 인과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 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어떤 계기적 사건들, 예컨대 혁명, 식민지배, 중대한 제도 변화 등은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당구공의 움직임처럼 서로 직접적인 인과 관계로 엮여 있지는 않다. 관건은, 마르셀 모스가 ‘총체적 사회적 사실(fait social total)’[5]이라는 말로 의도했던 바처럼 각각의 사회가 지닌 각각의 특징들이 어떻게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서구 근대성에 관한 찰스 테일러의 스케치는 좋은 참조점이다. 테일러는 서구의 근대성에서 핵심적인 것이 “사회의 도덕 질서(moral order)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동시대인들이 도덕 질서를 허물거나 굳힐 수 있게 만드는 공통 토대를 테일러는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이라 명명했다. ‘사회적 상상’이란, “동시대인들이 스스로 살면서 유지하는 사회를 상상하는 방식”이며 “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공통의 이해”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상’은 일종의 규범적 기대감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정당화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총체적 상황에 대한 구조화되지 않은, 불분명한 이해”이고 “결코 명백한 학설의 형태로 적절히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이 아닌 상상”이라 표현될 수밖에 없다.[6]

테일러는 ‘사회적 상상’ 개념이 “관념론”이라 공격받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장 하나를 할애해 논하고 있다(‘제3장 관념론이라는 유령’). 그는 사회적 상상 같은 개념을 배척하고 생산양식 같은 경제적 요인을 우선해 다뤄야 한다는 ‘유물론적 설명’이 “관념과 물질적 요인을 서로 경쟁하는 인과적 동인으로 파악하는 잘못된 이분법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한다. 또 그는 유물론적 테제가 “일관성을 지니지만 보편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목적론적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에 있어 유일한 일반 규칙은, 언제나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한 가지 수준의 동기를 규명해주는 일반 규칙은 없다는 것이다.”[7]

유물론에 대한 테일러의 비판은 지나치게 단순한 감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실천 동기들을 모조리 ‘경제’로 환원하는 접근법이 풍부한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론적 쟁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현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의 ‘쓸모’일 것이다. 예컨대 공정성 담론과 능력주의 등을 ‘도덕 질서에 대한 개념화’의 차원에서 논하는 일은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또한 ‘사회적 상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소속 집단을 인식하고 평가하게 하는 프레임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실천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계속>


[1] 이와 관련해 더 심도 있는 논의는 아마티아 센의 저술을 참고하라; 「Rational Fools: A Critique of the Behavioral Foundations of Economic Theory」, 『Philosophy & Public Affairs』, Vol. 6, No. 4 (Summer, 1977); 『정의의 아이디어(이규원 역, 2019)』; 『윤리학과 경제학(박순성·강신욱 역, 1999)』
[2] 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옥중수고Ⅰ』, 2006, 182쪽
[3] 같은 책 같은 쪽
[4]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민병희 옮김, 『잃어버린 근대성들』, 너머북스, 2012, 39-40쪽
[5] 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증여론』, 한길사, 2002, 25쪽
[6] 찰스 테일러, 이상길 옮김, 『근대의 사회적 상상 -경제·공론장·인민 주권』, 이음, 2010, 44-45쪽
[7] 같은 책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