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6공화국의 아이들

     

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 그래도 미스터 김은 마음씨 그만이에요……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할진 몰라도 그 이를 안 보곤 그런 말 마세요……
키다리 미스터 김이 없으면 난 못 살아요.
이금희, ‘키다리 미스터 김’, 1966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탓으로 ‘김 씨’는 어쩐지 대명사 같은 고유명사다. ‘김 씨!’라고 부르면 한국인 중 다섯에 하나는 ‘나 불렀소?’ 할 것이기에 생겨난 속담인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로부터 이어진 유구한 미스터 김의 계보는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유명했던 ‘미스터 김’으로는 김동완이 미스터 김으로 나온 KBS 일일연속극 〈힘내요, 미스터 김!〉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세 명의 김 씨가 풍미했던 한 시대가 20세기와 함께 저물어 가고 있을 무렵, 새로운 K 씨가 나타나 10대 여학생들의 시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K 씨들은 전 (어른) 국민의 시대정신이었지만, 21세기와 함께 등장한 K 씨는 오직 10대들에게만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금지곡이 된 덕인지 지금까지도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번번이 언급되며 중요한 사료 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해 혜성처럼 사라진 미스터 케이는 이제 그럭저럭 어른의 범주에 편입된 밀레니얼에게만 추억의 저편으로 남아 있다. 2000년대 초반을 휩쓸었던 것들의 대부분이 ‘흑역사’라는 박스(이 먼지 쌓인 타임캡슐은 아마도 언젠가 ‘응답하라 2002’를 통해 구원받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현재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시대는 90년대 말이니, 이제 곧 2000년대의 시대도 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에 담겨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스터 케이의 작은 역사

세기말은 폭풍처럼 지나갔다. IMF 외환위기와 Y2K 소동은 불안의 원인과 표출이었다. 국내에 상륙한 스타벅스 1호점과 더불어, 초고속 인터넷을 설치한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도시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과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의 흥행은 다가올 21세기의 예고편인 듯했다. 나라도 망할 뻔했고, 연도 표기의 앞머리도 바뀌는 마당에(그 때문에 아예 지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데!), 딱히 손에 쥔 게 없는 젊은이들이 일단 뭐라도 저질러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김진수 씨는 아마도 그런 젊은이였을 것이다. 1970년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시각디자인 전공, 37회의 공모전 입상이라는 화려한 실적, 졸업하기도 전에 모닝글로리 디자이너로 입사, 1년 5개월간 근무. 꽤 ‘전형적’인 디자이너의 스펙을 가진 김 씨는 지나친 야근에 비해 적은 월급, 타협 불가능했던 업무 스타일, 거기에 풍부한 외주 경험이라는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 퇴사를 결심한다. 고작 24세였던 그는 대학원을 다니며 요즘으로 치면 ‘소규모 스튜디오’인 ‘김진수 일러스트 사무실’을 차려 활동하다가 2년 뒤인 1996년 미스터 케이를 설립했다.[1]

미스터 케이는 개성 강한 캐릭터와 일러스트로 무장한 ‘캐릭터 벤처기업’이었지만, 그 전에 문구·팬시업계에서는 후발주자였다. 이에 김진수 씨의 동생 김성수 씨의 아이디어로 ‘콩콩이’, ‘소담이’와 같은 자사 캐릭터를 홍보하기 위해 팬시-편선지 성격의 잡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미스터 케이》의 탄생이었다.

[그림 1] 월간 《미스터 케이》 2002년 1~12월호

1998년 캐릭터 팬시제품 프로모션을 위한 무가지(창간 당시 가격 ‘사랑 한 스푼’)로 출발했던 《미스터 케이》는 당초 기대를 훨씬 웃도는 호응을 얻으면서 본격적인 정규 월간지로 전환, 2,000~2,500원 사이의 가격을 오가며 정기구독 시스템까지 갖춘 매거진으로 자리 잡았다.

비제도권 간행물이었음에도 2000년 8월 발행부수 20만부를 돌파한 데 이어 2002년 12월에는 40만부를 넘기며 ABC제도[2] 공인 국내 잡지 발행부수 2위를 기록했다. 《미스터 케이》의 인기에 힘입어 ㈜미스터 케이[3]는 2001년 상반기 국내 영업이익 5위(8억 1,200만 원)를 달성[4]하는가 하면 서울 잠실에 사옥을 마련하는 등 자타공인 전성기를 누렸다.

IMF 직후 바른손과 모닝글로리가 부도를 내면서 팬시업계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던 《미스터 케이》는 2003년 11월 갑작스러운 부도를 맞이한다. 이때 ㈜미스터 케이는 통신회사인 삼우통신공업에 인수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 2004년 같은 편집부가 《우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스터 케이》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의 성화에 힘입어 몇 개월 후 《월드 미스터 케이》라는 이름으로 복간, 이후 다시 《미스터 케이》라는 제호를 되찾아 2007년 폐간까지 지속하게 된다.


현대의 신화[5]

하나의 잡지, 하나의 브랜드가 어떻게 한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물론 가장 큰 인기 비결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재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터 케이》의 가장 중요한 셀링 포인트는 잡지 분량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패러디 편선지’였고, 유머를 구현하는 디자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미스터 케이》는 한국 디자인사에 있어서도 어쩌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2001년 당시 디자인 전문 매거진 월간 〈디자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당시 디자인 전공자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어 하는 국내 디자인회사는 윤디자인(1위), 이노디자인(2위), 미스터 케이(3위), 쌈지(4위) 순으로 나타났다. 각각 시각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을 대표하던 윤디자인과 이노디자인에 뒤이어, 초히트 캐릭터 ‘딸기’로 상한가를 치고 있던 쌈지를 제치고 미스터 케이가 3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는 특히 디자인이라는 측면에서 미스터 케이가 주 소비층인 10대뿐 아니라 20대 전공생에게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재미와 디자인만으로 한 세대를 아우르는 호응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림 2] 2002년 5월 창간 4주년 기념호에 실린 독자 인터뷰 중 일부. 당시 애독자 중 상당수는 미스터 케이에 취직하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다.

이런 경우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은 희소성이지만, 청소년을 타깃으로 한 잡지가 드물었던 것은 아니다. 《미스터 케이》 이전에도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하이틴》이나 《여학생》 같은 잡지들이 있었지만,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미스터 케이》가 시대를 초월해 ‘모든 10대’에게 매력을 끌 수 있는 에버그린 콘텐츠였는가 하면, 그 역시 아닐 것이다. 2019년에 《미스터 케이》가 복간되어도 지금의 10대 사이에서 그만큼의 인기를 구가할 것인가? 당연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사이 상전벽해 수준으로 매체 환경이 변화했고, 이를 수용하는 청소년의 태도 역시 그에 맞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 10대였던 시간의 실향민들만이 문화적 고향의 귀환에 반응할 것이다. 《미스터 케이》의 인기는 2000년대 초반이라는 특수한 시간적 조건 안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그림 3] 《미스터 케이》를 추억하는 시간의 실향민들의 모습

따라서 《미스터 케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초반이라는 시간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당시의 10대였던 밀레니얼 세대라는 군상이 만나 무엇이 되었는가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 접근은 수많은 각도에서의 계산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우선 ‘2000년대 초반의 10대’를 따라가 보려 한다.


모든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

특정한 시공간의 특정 세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전 시대, 이전 세대와의 차이를 먼저 지목해야 할 것이다. 《미스터 케이》의 시간은 그 이후와 다르듯, 그 이전과도 분명 무엇인가가 달랐다. 그런데 ‘무엇이’ 달랐음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를 밝히기 위해 새로운 연구 방법을 창안하는 것보다는, 다소 고리타분하지만 공신력 있는 CCCS[6]의 연구를 빌려오는 것이 효율적일 듯하다. 새로운 ‘부족(청년문화)’이 탄생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전반적인 풍요로 인해 젊은이들의 소비력이 커지고, 교육기회가 광범위하게 확대된다. 대중매체(특히 텔레비전)가 확산된다. 거대한 사건(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 여기에 새로운 스타일과 유행이 출현하면서 청년문화와 기존 문화 사이에 구분이 생긴다.

이 같은 조건들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국민들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릴” 만큼 전례 없던 물질적 풍요로 인해 청(소)년들의 소비력은 이미 X세대부터도 커져 있었다. 의무교육이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문민정부 이후 대학 진학률이 대폭 증가하면서 교육 기회가 넓어졌다.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인터넷이 들어와 정보의 바다가 펼쳐졌다. 당시 사회적 혼란을 몰고 온 IMF 외환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새로운 스타일과 유행’은 종잡을 수 없는 범주지만, 1·2세대 아이돌의 출현만 보아도 확인 가능한 조건이다. 밀레니얼의 정신구조를 형성한 10대 시절은 2000년대 초반에 조성된 이러한 환경들과, 또한 여기에 나열되지 않은 시대적 조건들 간의 긴밀한 상호 영향 속에서 해설되어야 한다.


6공화국의 아이들

밀레니얼은 6공화국의 아이들이자 6·7차 교육과정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는 이 기획에서 밀레니얼의 범주로 산정하고 있는 1985~1995년생 이전의 80년대 초반생, 즉 ‘이해찬 세대(1983~1985년생)’가 포함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야간자율학습, 물수능 같은 어휘들 말이다.

진학 스트레스로 따지자면 유사 이래 이해찬 세대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세대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물수능의 추억을 술안주 삼아 씹고는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집단 간 불행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경기가 없다. 사실 교실에 대한 악감정은 그 전 세대에게도 똑같이 존재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그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1994

교실은 세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스트레스의 공간이었다. 교실에 대한 X세대의 적대감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 가사가 Z세대에게까지도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무의미한 크기 비교와 별개로,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조건의 변화는 고통의 종류를 다르게 만든다. 이에 따라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미스터 케이》 탄생 직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누가 뭐래도 IMF 외환 위기였고, 밀레니얼은 밀레니얼이기 이전에 ‘IMF 키즈’였다. 남북정상회담과 월드컵의 감동이 IMF의 삭막한 기운을 조금씩 몰아내고 있었지만, 한 번 찾아온 불안과 해리, 비관주의의 후유증은―심지어 지금까지도―돌이키기 어려운 정서였다.

가정이 깨지거나 차라리 깨지는 것이 나았을 아이들은 투니버스를 틀어 놓고 방구석에 처박히거나 놀이터를 전전했다. 개중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참고서와 학습지를 붙들고 밤늦게까지 교실에 남았다. 부모가 맞벌이를 유지한 학원가의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를 돌면서 텅 빈 가정의 공기로부터 피신했다.

비교적 사정이 나은 아이들은 비교적 나을 뿐이었다. 청소년은 가정과 학교, 사회의 애정 어린 시선 속에 건강한 시민 주체로 성장해야 마땅한 존재지만, 이들에게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관심을 쏟기에는 어른들의 사정이 너무나 각박했다. 이는 참으로 진부하고, 단편적인 데다, 지나치게 일반화된 서술이지만, 부정하기는 어려운 기저 의식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나 그랬듯, 본능적으로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간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대 속 ‘주변인’, 10대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줄 존재는 서로 밖에 없었다. 이때 등장한 《미스터 케이》는 이들의 연결감을 채워 주는 커뮤니티를 자처하면서 10대들과 함께 성장했다.

여기까지의 개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시대 반영적 매체 《미스터 케이》를 통해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적 기원들을 찾아볼 것이다.

최은별 / 디자인문화연구자



[1] 디자인정글, ‘하늘 아래 캐릭터로 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다!!’, 2002.11.12 
[2] 한국ABC협회(Audit Bureau of Certification: 신문·잡지· 웹사이트 등 매체량 공시기구)의 부수인증제도 
[3] 미스터 케이는 2000년 3월 캐릭터 벤처기업 ㈜미스터 케이 법인을 설립하면서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이 글에서 잡지명은 《미스터케이》로, 회사명은 ㈜미스터 케이로, 브랜드를 통칭할 때는 미스터 케이로 표기했다. 
[4] 매일경제, ‘상반기 영업이익 상위 10개사’, 2001.08.17 
[5] 롤랑 바르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6] CCCS(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1964년 설립된 버밍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센터. 동시대 청년 문화 연구에 있어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참고한 자료는 Clarke. J, et al, 「Subcultures, cultures and class」, 『Resistance Through Rituals: Youth Subcultures in Post-War Britain』,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