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공정성, 그 진짜 의미는?

     

부자는 단지 화폐만 상속하지 않는다. ‘능력’까지 상속한다. “능력이나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자본이 투여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에 따라서 교육적 성취의 룰마저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능력주의 시스템, 즉 ‘공정성’을 고집할수록 불평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즉, ‘수저계급론’은 능력주의 사회에 배치된다기보다 능력주의 사회에 부합한다.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공정성

공정성(公正性, fairness)을 문제 삼는 것. 그것은 사회적 자원이 얼마나 정의롭게 배분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불공정한 일에 분기탱천하는 일을 반복하면 공정한 사회가 ‘도둑처럼’ 찾아올까? 그럴 리 없다. 분노의 유통기한은 짧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훨씬 더 짧다. 반면 불공정한 사회구조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그 구조를 유지하는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다. 그래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대의를 세워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그려보아야 한다. 여기서 질문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공정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그 공정성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불공정한 일을 보고 분노할 때, 그것을 시정하는 기준이자 원칙이 되는 공정성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석학이나 천재 몇몇이 정답을 내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숙고하며 토론해야 하는 물음이다. 이 관점에서 공정성을 다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크게 세 층위로 구분될 수 있다. ‘불공정성’ ‘형식적 공정성’ ‘실질적 공정성’이 그것이다. 이는 이론적‧학문적 구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용적 구분이다. 불공정성은 글자 그대로 공정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비난받는 불공정성은 공정한 경쟁을 가장한 특혜다. 예를 들어 보자. 세 꼬마가 각자의 키보다 높은 울타리 너머로 야구경기를 보려 한다. 그런데 오직 한 명에게만 올라설 받침대를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당장 사람들이 불공정하다며 아우성칠 것이다. 그렇다. 이런 게 바로 노골적 불공정이다. 이런 종류의 불공정은 여전히 많다. 또 대부분 불법이기에 발각되면 처벌받는다.

다음으로 형식적 공정성이 있다. 형식적 공정성이란 야구경기를 보고 싶은 세 꼬마 모두에게 똑같은 받침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회의 형식적 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흔히 언급되는 “공정성”이나 “공정한 경쟁”은 이 형식적 공정성에 가깝다. 2018년 발표된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는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1]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였다. 차등분배를 선호하는 응답은 전 계층 및 사회집단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능력주의(meritocracy)를 공정성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평창 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이 ‘불공정하다’고 반대한 근거도 정확히 능력주의 원칙이었다. 왜 능력과 노력을 인정받은 선수가 아닌 ‘낙하산’이 와야 하냐는 것이다.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 달리 공정성에 예민하기 때문에 강하게 반발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지만 이 보고서는 기성세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 꼬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중요하지만 간과된 문제가 있었다. 꼬마들의 키가 달랐다. 한 명은 받침대 위에 올라가면 야구경기를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큰데 반해, 나머지 두 명은 받침대에 올라서도 울타리 너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어쨌든 똑같은 받침대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줬으니 ‘공정’한 것일까? 울타리 너머 야구경기를 본다는 목적에 비추어보면, 키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능력이다. 키 차이는 곧 능력의 차이다. 능력주의-형식적 공정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공정하다고 해야 일관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직관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그 직관은 옳다. 그건 허울뿐인 공정성이다.

꼬마의 키처럼, 현실적으로 ‘능력’이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대부분 ‘운’에 의해 발생한다. 부자에 서울대 교수인 부모의 딸과 기초수급대상자 부모의 딸은 설령 지적 능력이 동일하다고 해도 성장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너무나 희소한 자원들을 아무 노력 없이, 그저 ‘가족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제공받는다. 부모님과 지인들 모두 각 분야 전문가급 인력이므로 언제든 조언을 구하고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쾌적한 주거환경과 양질의 식사와 의료는 가진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준다. 기초수급 대상자의 딸은 어떨까. 교육이나 입시 이전에 이미 건강 상태부터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생리대 같은, 그야말로 생물학적 삶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 자원조차도 조바심내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겨우 마련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의 차이가 각자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필연적으로 ‘능력’ 그 자체가 달라져 버릴 것이다.


돈 많은 부모, 뛰어난 지능, 탁월한 신체능력,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 같은 요소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능은 개인의 성공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천부적 자질의 배분에서 생겨나는 각자의 위치에 대해 응분의 자격을 갖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쉽게 말해 재능이 불평등하게 나뉘어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생겨나는 상황은 결코 당연하거나 정의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롤스는 “(노력할 수 있는) 성격은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할 수 없는 훌륭한 가정이나 사회적 여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없다”면서 ‘노력할 수 있는 성격’ 또한 재능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자유주의자 롤스보다 왼쪽에 있는 학자들이 형식적 공정성의 한계에 대해 더 급진적으로 비판해왔음은 물론이다.

능력주의-형식적 공정성은 실재하는 불평등을 교정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구조적 불공정성의 기제로 작동하며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할 뿐 아니라, 노골적‧불법적 불공정을 알리바이 삼아 현존하는 불평등을 ‘정상적인 것’으로 승인한다. 능력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맹신하는 순간, 구조적 불공정은 은폐되거나 심지어 정의로운 상태로 오인되는 것이다.


능력주의, 그 암흑의 핵심

한국인 다수가 공유하는 ‘공정성에 대한 감각’이 있고, 이 감각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능력주의가 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인의 공정성은 ‘능력주의적 공정성’이다.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 집착만이 아니라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강렬한 지위상승욕구와 “될 놈만 밀어주자”는 선택과 집중 논리, 약자 도태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 등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요컨대 능력주의야말로 ‘암흑의 핵심’이다.

능력주의의 의미는 본래 ‘능력에 따른 지배’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라 지위나 재화가 배분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이다. 보편적 교육권을 명시하고 있지만 ‘능력에 따라’라는 단서가 달려 있다. 이 조항을 보면 능력주의가 교육과 관련해서도 한국사회를 규율하는 핵심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만의 특성은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능력주의 이념과 제도, 문화가 나타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6조는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있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2]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in 1789

교육 분야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능력주의는 한국인의 일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꿀 수 있고 바꿔야 마땅한 사회 제도․법․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피해자 탓하기’와 ‘책임의 개인화’로 귀결시켜 “결국 네가 공부 안해서 그런 거잖아”라는 식의 말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일”은 흔하게 목격된다.[3]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한국사회의 약자들이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특히 최근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자주 관찰되는 담론은 ‘불평등에 대한 적극적 정당화’다. 아래 기사는 한국사회에서 약자가 약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능력주의를 적용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지난 23일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중 하나는 ‘공정성’이었다. 한 신입사원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든 취준생(취업준비생) 시절을 거쳐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 오늘은 수능날이다. 힘들게 수험생활을 한 후배들에게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그들은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이라는 피켓도 들었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시달려 온 우리가 ‘능력주의’에 따른 엄격한 공정함을 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공정한 사회의 약자였을 사람들이 힘들게 노력한 대가로 시험을 통과해 정규직이 된 것 역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규직 되고 싶은 비정규직은 시험 치르고 들어오라”는 말에서는 숫자와 등수로 환산될 수 있는 시험만이 공정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잣대라 여기는 강박을 감지하게 된다. 도대체 15년 동안 인천공항의 특수경비원과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온 사람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공정한’ 시험이 뭔가. 경영? 토익? 인·적성 검사? 지난 15년 동안 보여준 업무태도와 성과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잣대가 아닌가.[4] 
 

능력주의는 근대사회가 전근대사회보다 우월한 증거로서, 그리고 누구나 동의하고 또 동의해야 하는 가치로서 인정받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능력주의와 일반적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 쓴 글에서 능력주의를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장치”이자 “끝없는 축적의 불합리성을 감추는 가면”이라 표현한 바 있다. 자본주의 등장 이전에도 능력주의적 현상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능력주의가 다른 점은 그것이 “하나의 공식적인 덕목으로서 천명되었다”는 점이다.[5]

한국 역시 산업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의 추세와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한국은 수능점수를 능력과 동일시하는 식의 ‘능력의 물신화(物神化)’ 현상이 쉽게 목격될 정도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상대적으로 더 격렬하게 분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 자체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깊이 진행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2015년 김낙년의 연구[6] 는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소위 ‘수저계급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그는 논문에서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이 1970년대 37%에서 2000년대 42%로 높아졌다”고 추산했다. 김낙년은 연구와 관련,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만약 상속이 저축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의 축적 경로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축적된 부의 불평등이 높다면 그 사회는 능력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수저 계급론’이 능력주의 사회와 배치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대조적인 대답을 내놓았을지 모른다. 부자는 단지 화폐만 상속하지 않는다. ‘능력’까지 상속한다. “능력이나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자본이 투여된 산물”이기 때문이다.[7] 그들은 때에 따라서 교육적 성취의 룰마저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능력주의 시스템, 즉 ‘공정성’을 고집할수록 불평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즉, ‘수저계급론’은 능력주의 사회에 배치된다기보다 능력주의 사회에 부합한다.

반복되는 ‘공정성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정’이란 것이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면서 점차 능력주의라는 진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그동안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매우 긍정적인 개념이었다. 능력주의의 ‘과소’가 문제시되었을 뿐, 그 과잉이 사회 문제로 포착된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한국사회 불평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일 뿐 아니라 ‘공정’과 ‘정의’를 가장해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식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능력주의는 다양한 층위와 방식으로 해부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관한 기존 접근들은 한국사회 능력주의를 주로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관점에서 논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시점의 공정성과 능력주의만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일제 강점시기, 심지어 조선시대도 살펴볼 것이다. 오래전의 어떤 문화들이 오늘날 한국의 능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 테제 중 하나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능력주의를 역사화 함으로써, 능력주의의 사회적 맥락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으로 조망하고 동시에 그 믿음체계의 정합성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의 궁극적 목표다.[8]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정한울·이관후,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 『한국리서치 월간리포트』, 2018.02.02. 
[2]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 
[3] 강준만,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 :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의 심리적 기제」, 『사회과학연구』 55집 2호, 2016, 321쪽 
[4] 정유진, 「공정함에 집착하는 불공정 사회」, 『경향신문』, 2017.11.28. 
[5] 이매뉴얼 월러스틴, 나종일․백영경 역,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창비, 1993, 89-90쪽·141쪽 
[6] 김낙년,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 낙성대경제연구소, 2015 
[7] Pierre Bourdieu. 「The Forms of Capital」 In J. G. Richardson(ed.). 『Handbook of Theory and Research for the Sociology of Education』. New York: Greenwood. 1986. p.244 
[8] 주요 내용은 「한국 능력주의의 형성과 그 비판 : 『고시계』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박권일, 2018)을 원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