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부터 시험에 환장하던 민족

     

이는 종종 ‘교육열’이라는 기괴한 단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사실 그건 교육과 별 관계가 없다. 이토록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장시간 학대하고 스트레스로 자살하게 만드는 비인간적 시스템이 무슨 ‘교육’ 씩이나 된단 말인가. 교육과 구별되는 기제로서 ‘입시’, 그리고 각종 ‘고시’를 포괄하는 ‘시험’은 교육이 아니다. 한국의 입시와 시험은 교육이 아니라 ‘특권에 자격을 부여하는 통과의례’다.

‘근대’를 선취한 조상님들

‘국민성’/‘민족성’ 담론은 읽을 가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특히 유전적 특질 운운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화적 전통은 그런 종류와는 다르다. 다른 공동체와 구분되는 전통 내지 습속은 각종 제도와 집단적 실천의 형태로 실존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수많은 ‘어제-들’의 축적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공동체 성원의 삶 속으로 진하게 삼투해 만들어진 것이 문화이고 습속인 것이다.

자타 공인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습속 중 대표적인 게 ‘빨리빨리’라는 말로 대표되는 조급증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그것이 한국인의 고유한 성격이라기보다는 근대 이후, 이른바 압축성장 시기의 집단경험을 통해 체화된 것으로 이해한다. 목표는 단지 달성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초과’ 달성되어야 한다.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노오오력’이 필요했다. 그래야 늦게 출발한 우리가 상대를 따라잡을 수 있고 또 추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급증만큼이나 유명한 게 “살인적”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닌 한국인의 입시경쟁이다. 이는 종종 ‘교육열’이라는 기괴한 단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사실 그건 교육과 별 관계가 없다. 이토록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장시간 학대하고 스트레스로 자살하게 만드는 비인간적 시스템이 무슨 ‘교육’ 씩이나 된단 말인가. 교육과 구별되는 기제로서 ‘입시’, 그리고 각종 ‘고시’를 포괄하는 ‘시험’은 교육이 아니다. 한국의 입시와 시험은 교육이 아니라 ‘특권에 자격을 부여하는 통과의례’다.

오죽하면 “시험은 한국인의 사회적 DNA”[1]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나 단지 그것을 한국인의 특이한 기질 내지 물신숭배 따위로 치부할 수는 없다. 단순히 시험이나 시험 만능주의를 ‘사회악’으로 치부하고, 시험을 없애면 마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시험은 문제의 이유나 원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결과에 가깝다. 대한민국이 ‘입시 공화국’이 된 건 사람들이 시험에 특별한 페티시가 있어서가 아니며,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라 믿어서도 아니다. 다들 문제 많은 방식임을 잘 안다. 알지만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다. 한날한시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 점수를 비교하는 시험 형식이야말로, 논란의 소지를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공정성과 정의에 민감할수록 시험 만능주의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입시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현대 입시제도의 산물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시험을 통한 입신출세’라는 관념은 단지 현대에 들어와 생겨났다고만은 보기 어렵고, 식민지 시대 일본의 영향이라고 단순화할 수도 없다. 많은 근대적 제도와 문화가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 수입된 게 사실이고 한국이 일본의 공교육 과정을 그대로 베껴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철저한 봉건 세습사회였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시험을 통한 입신출세라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다. 반면 한국은 달랐다. 한반도는 ‘입시 공화국’이 되기 수백 년 전부터 ‘시험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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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BS 뷰, CC BY 3.0, 링크


근대 이전 한반도에 존립했던 사회, 예컨대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 왕족과 극소수 귀족만이 권력을 전유하였던 정체되고 폐쇄된 사회로 그려진다. 당시의 인재선발제도인 과거제도 역시 이런 통념에 따라 이해되어온 경향이 강했다. 과거제도는 전근대적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기제로서, 그리고 체제의 몰락을 가속시킨 적폐로서 주로 언급될 뿐, 그 능력주의적 측면은 간과되거나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본다면 수백 년 전 과거제도는 인재 선발제도로 미진해 보인다. 그러나 비교 지평을 제도가 시행된 당대의 세계로 전환하면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지평에서 보면 과거제도는 다른 문화권이 아직 갖추지 못한 ‘근대적 합리성’, 바꿔 말해 지적 능력 중심의 능력주의를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1천 년 이상 선취한 제도가 된다. “다른 지역에서의 지배층은 무력을 장악한 계급이었으며 그들은 신분에 의한 세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봉건시대의 유럽이 그러했다. 그리고 같은 동아시아에 속하는 일본에서도 과거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봉건사회에서의 지배층은 무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사무라이 계급이었다.”[2]

“과거제가 오로지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베트남의 역사와 전통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관리 선발제도란 점”[3]은 사실 자체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과거제도를 재평가하는 작업은 최근에서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동아시아 3국, 즉 중국, 한국, 베트남 역사에서 시행된 과거제도를 고찰한 뒤 이들 세 나라가 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합리화’를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한국, 베트남에 성립한 왕조들은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상류사회의 세습적 권리에 관계없이, 명확한 규정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적인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들을 뽑았다.”[4]

그 시기는 서구사회가 세습적 신분 사회에 머물러 능력주의적 인재 선발을 아직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지위와 권한을 배분하는 능력주의 체제는 서구 사회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출현한다.[5] 우드사이드는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이 착각이자 오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1922년 『중국인의 문제』라는 책에서 중국이 오래된 낡은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충고했을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은 세습적인 상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러셀 자신도 귀족 출신으로서 여전히 귀족적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재를 모집하는 획기적인 과거제도를 통해 세습적 권력에 기반을 둔 통치가 막을 내린 지 이미 천년이 지나고 있었다. 능력주의의 성향이 이미 주류가 된 동아시아에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과거시험과 관료제는 실제로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서구에 전해져 오히려 서구의 ‘근대성’의 형성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사회는 ‘봉건적’이라고 묘사되는 인격적이고 사적 감정에 기반을 둔 통치를 했던 반면에 유럽 사회에 대해서는 사적 감정을 배제한 규칙과 이성에 기반을 둔 통치 질서를 가졌다는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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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Dynasty Painting, Public Domain, Link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도

과거제도는 어떻게, 또 얼마나 능력주의적이었는가? 또한 과거제도는 이후 한국 사회에 어떤 형태로 영향을 끼쳤는가? 이를 위해 과거제도의 역사와 내용을 개괄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선 고려 시대 과거제의 도입을 간략히 서술하고 조선의 과거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고려는 중국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도입해 제술업, 명경업, 잡업의 세 부문에서 일곱 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시행된 최초의 과거제도로, 고려 광종(光宗) 9년(958)의 일이었다. 과거제도 도입의 정치적 배경은 중국과 유사했다. 국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엘리트 선발에 있어 그 기준, 범위, 시행방식을 왕이 결정함으로써 문벌귀족 세력의 힘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통일신라 원성왕 4년(788)에는 국학의 학생을 대상으로 유학 경전에 대한 시험을 보게 하고 그 성적에 따라 관직을 부여한 적이 있었다. 바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그것이다. 또한 최치원의 경우처럼 당에 유학해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일도 일어났다. 즉, 고려 이전부터 이미 유학과 과거제에 대한 선이해가 존재했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고려 시대에 과거제도를 도입하는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7]

고려의 과거제도는 출신 가문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음서제와 병용되었고 귀족제도와 타협하며 존속했던 과거제도의 한계 또한 명확했다. 그럼에도 일반 서민에게 원칙적으로 응시 자격이 부여되었기에 이전에 비해 사회 이동성(social mobility)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명백한 신분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시험을 통해 식견과 소양을 검증한다는 능력주의적 제도와 습속은 빠르게 안착했다. 그것은 하나의 비가역적 변화로서, 무려 1천 년 가까이 국가 운영의 근간을 형성했다. 국가적 비상사태나 전란 속에서도 과거제도가 포기되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 들어 “무신란이 발생하여 무신정권이 성립한 상태 아래에서 과거는 오히려 활기를 띠었고,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하거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몽진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거가 중단 없이 시행되었던 것이다.”[8]

과거제가 확립된 시기는 조선 시대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과거제도는 강화되고 개혁되었다. 불규칙했던 시험 주기가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로 조정되고, 비정기적인 별시(別試)가 따로 시행되었다. 지나치게 잡다했던 시험과목이 정리되어 문과(文科), 잡과(雜科), 무과(武科), 소과(小科)로 통합되었다.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로 나뉘는 소과는 문과의 예비시험 성격이었다. 문과에 최종합격하지 않고 소과에만 합격할 경우, 중앙의 관료가 될 수는 없었으나 지역에서는 최진사, 박생원 등으로 불리며 양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과거 시험의 핵심은 문과였고, 문과에 급제해서 홍패를 받는다는 것은 각고의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시험은 크게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세 단계였는데 각 단계는 다시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로 나뉘므로 총 9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셈이었다. 문과의 시험과목은 크게 나눠 경학(經學), 문사(文詞), 대책(對策)의 세 가지였다. 경학은 유학의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대한 이해를, 문사는 시문을 작성하는 문장력을, 대책은 사회 현안에 대한 이해와 문제해결 능력을 보는 시험이었다.[9]

문과의 합격자 수와 명단은 『문과방목(文科榜目)』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문과 시험은 1392년부터 1894년까지 503년 동안 총 748회 시행되어 14,606명의 급제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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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과거제도의 능력주의적 요소

조선은 과거제도의 운용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많은 전란과 당쟁을 겪으며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취약해지고 과거제도 역시 부패하며 많은 문제를 양산하게 되지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국가는 과거제에서 일체의 부정을 배제하기 위해 강박적일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1400년대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수험자의 답안지는 각각 수거, 등록, 기록, 대조, 그리고 검토를 담당하는 관원들의 손을 거쳐야 했다. 검토를 담당한 관원들은 답안지에서 수험자의 이름이 가려져 있는지, 채점관이 채점에 들어가기 전에 답안지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필사되었는지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채점관이 수험자의 답안지를 평가했는지를 확인했다. 현대 서구의 대학에서 시행되는 시험에서도 투명성 제고를 위해 이토록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10]
예전의 과거제 연구들에서는 과거제 응시 자격 제한 등을 근거로 조선의 과거제도가 “현실적으로는 양반에 한해서만 과거 응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11]는 평가가 다수였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 중 상당수는 과거제도의 능력주의적 성격에 주목한다. “조선시대 과거제가 신분제의 전제 위에서 신분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운용되었다는 통념은 여러 연구에 의해 반박되고 부정되고 있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는 적어도 관료 선발에 있어서는 혈연주의나 정실주의를 지양하고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른 능력주의의 이념이 적용되던 시대이다.”[12]

조선의 과거제는 문호개방, 기회균등의 기본 원칙 아래서 양민 이상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표방하였다. 개인에게는 명예와 실리를 제공하는 입신출세의 통로이기도 했다.[13] 물론 서얼 차별이나 연좌제에 입각한 응시 자격 제한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현대적 맥락에서 말하는 ‘평등한 기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음서제가 여전히 활발히 작동했던 고려의 과거제보다 조선의 과거제는 훨씬 더 능력주의적 지향이 강한 제도였다.

최근 연구들은 다양한 사료에 나타난 실증적 수치를 근거로 조선의 과거제가 상당한 수준의 사회 이동성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한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중 35.7%는 사조(직계 3대와 외조부) 안에 전·현직 관료가 없는 일반 평민이었고, 사림이 권력을 장악했던 조선 중기가 아닌 조선 초기와 말기에는 계속 50%를 상회할 만큼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주의 사회였다.”[14] 2015년 기준으로 최근 10년간 사법시험 합격자 7,900명 중에서 고졸 이하 출신은 5명으로 합격자 중 0.06%에 불과했다는 점[15]에 견줘보면, 조선 시대 과거제도는 상대적으로 ‘개천용’이 나오던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조선 과거제도는 경우에 따라 신분제도 자체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초월하는 기제로도 작동했다. 예컨대 효종은 만약 노비 출신이 신분을 속이고 과거에 합격한 것이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그 자손들을 다시 천인으로 되돌리지 말고 양인으로 두도록 하교한 적이 있었다. 경쟁시험에서 능력을 입증한 자에게 왕의 관용을 빌어 초법적 특권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과거제도의 위상과 권능이 잘 드러난다.

차라리 국가의 공천(公賤)을 잃더라도 차마 우리 백성에게 유리(流離)하여 시름하고 탄식하는 괴로움이 있게 할 수 없다. 도감을 시켜 그 할아버지부터 혹 급제하였다거나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그 아들과 자손이 그대로 법을 어겨 양인이 된 자는 특별히 탕척하는 법을 써서 그대로 양인이 되는 것을 허가하라. 그 아버지부터 비로소 급제하였거나 생원·진사가 되어 그 아들이 그대로 법을 어겨 양인으로 있는 자와, 혹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숨기고 빠트려서 법을 어겨 양인이 되었더라도 미처 급제하지 못하고 그 손자가 비로소 출신(出身)하였거나 생원·진사가 된 자는 모두 대속(代贖)하도록 허가하라. 여자도 다 남자와 같이하라. 그 외는 논하지 말고 법대로 하되, 3대 이전에 급제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자수한 뒤에야 위와 같이 시행하고, 자수하지 않고 혹 진고(陳告)나 추핵(推覈)으로 말미암아 드러났으면 모두 논하지 말고 도로 천적에 붙여서 나라의 기강을 바르게 하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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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라는 신분의 이중적 성격

과거제는 양반이라는 신분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양반(兩班)은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본래는 두 개의 반을 의미했다. 왕과 직접 대면하는 동반(문관)·서반(무관) 관료들이 바로 양반이라는 말의 유래다. 그런데 실제로 중앙과 지방에는 관직에 몸담지 않은 훨씬 많은 숫자의 양반계급이 존재했다. 이들은 고위직 관료와 혈연 등으로 연결된 집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계층이요, 따라서 양반과 비양반의 한계 기준이 매우 상대적이요 주관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17]

법제화된 신분구별은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이 있었을 뿐이므로 법적으로 평민 계급과 양반 계급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누가 양반이고 누가 양반이 아닌지 혼동하는 일은 없었다. 중세 일본의 지배계급이 엄격히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음을 상기해보면, 조선의 지배계급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반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되려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인물 혹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그 시대의 저명한 학자로서 인정되는 사람을 시조로 하며, 그 사람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요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조는 혈통이 아니라 개인적 능력으로 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학문적으로 혹은 무장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기만 하면 누구나 시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 귀족이 되려면 고귀한 혈통이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과 비교할 때 양반 집단의 시조가 갖고 있는 개방적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8] 

인용문에서 미야지마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혈통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결정된다는 개방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 개방성은 양반 자체가 아니라 양반의 ‘시조’의 개방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미야지마는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이를 명시해 서술하고 있다.

양반의 지위는 법적으로 문·무반 관료와 그의 직계 가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세습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습적 성격이 또렷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강하고 공고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양반의 시조는 능력주의적 경쟁으로 선발되어 양반이라는 특권을 획득하였지만, 그들의 자손은 능력과 노력을 입증하지 않고도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양반으로 대우받았다. 요컨대 양반은 ‘원칙적 획득 신분’이지만 동시에 ‘관습적 세습 신분’이었던 것이다.

양반 신분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과거제도의 능력주의적 요소를 평가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할 점이다. 과거제 자체는 실질적으로 완전개방경쟁이 아니었지만, 당대 현실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기회평등을 추구한 능력주의적 경쟁이었다. 그러나 경쟁 승리의 보상으로 주어진 사회적 특권이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고 친족과 자손에게 확대적용된 것은 능력주의적 특성을 상당히 상쇄하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만약 과거제가 선발한 인재의 특권이 일체 세습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즉 과거제의 능력주의적 특성이 상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학적으로는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에 가깝다. 과거시험 합격자에게 지나친 특권을 부여한 반면, 합격자들은 일단 특권층이 되고 나면 예전처럼 노력할 동기가 현저히 떨어져서 사회적 생산력을 향상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현대 한국사회의 각종 고시 제도는 사실상 세습적 성격을 제거한 과거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고시는 “개천의 용”이란 말로 흔히 표현되는 것처럼 ‘지위 상승의 공정한 기회’라 옹호되는 한편으로 여러 심각한 사회 문제를 낳았다. “조선 시대의 과거와 가장 유사한 현재의 제도는 고시제, 특히 사법고시일 것이다. 수많은 인재가 고시 공부에 매달리면서 이른바 ‘고시 낭인’이 양산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시합격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상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19]

양반 신분의 이중성이라는 말은 결국 능력이 지대화되어 세습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대추구 행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어 사회의 생산력 상승을 압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제도가 근대 능력주의의 맹아적 특징을 갖추고 있음에도 사회 전체의 근대적 발전으로 빨리 이어지지 못한 이유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이경숙,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2017 
[2] 이남희, 「과거제도, 그 빛과 그늘」, 『오늘의 동양사상』 18, 2008, 118쪽 
[3] 민현구, 「과거제는 한국사에 어떤 유산을 남겼나」, 『한국사 시민강좌』 46, 2010, 170쪽 
[4]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민병희 옮김, 『잃어버린 근대성들: 중국, 베트남, 한국 그리고 세계사의 위험성』, 너머북스, 2012, 24쪽 
[5] 손준종, 「교육논리로서 능력주의 제고」, 『한국교육학연구』 제10권 제2호, 2004, 136쪽 
[6] 우드사이드, 같은 책, 14쪽 
[7] 민현구, 같은 책, 170쪽 
[8] 민현구, 같은 책, 174쪽 
[9] 이남희, 같은 책, 124쪽 
[10] 우드사이드, 같은 책, 25쪽 
[11] 김기옥,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현대 행정고등고시의 비교연구」, 『인문사회과학연구』 제7집, 2004, 190쪽 
[12] 강창동(2005), 이정규(2003), 민현구(2012); 박주병, 「능력주의와 과거제의 전통에 대한 교육학적 고찰」, 『중등교육연구』 65(2), 2017, 411쪽에서 재인용 
[13] 김판석․윤주희, 「고려와 조선왕조의 관리등용제도 -과거제도의 재해석」,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11(2), 2000, 143쪽 
[14] 한영우, 『과거, 출세의 사다리』, 지식산업사, 2013, 10-21쪽 
[15] 오창민, 「사시, 개천서 용 나는 시스템 아니다」, 『경향신문』, 2015.07.19. 
[16] 『효종실록』 권14, 6년 2월 18일 
[17] 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1987, 37쪽 
[18] 미야지마 히로시, 노영구 옮김, 『양반』, 너머북스, 2014, 5-6쪽 
[19] 이상학, 「지대추구경합의 실제 사례: 과거제, 수학능력시험 및 고시제를 중심으로」, 『한국공공선택학연구』 제4권 제1호, 2016,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