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하는 능력주의’의 한국적 기원

     

사회진화론은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 애국계몽운동과 결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화 되었다. 학교설립, 각종 캠페인과 강연, 독본(讀本)과 서적의 편찬 등 애국계몽운동의 실질적 활동에서 사회진화론은 핵심적인 이론으로 기능한다.

자연화(自然化)한 능력주의, 사회진화론

이론적·사상적으로 논파되고 폐기된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상적 조류가 있다. 1800년대 후반, 구한말이란 시공간으로 흘러들어온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 그것이다. 사회 진화론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강자생존(强者生存) 등의 유사 진화론적 법칙을 인간사회의 현실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나아가 인간사회가 마땅히 따르고 지향해야할 당위로서 제시되었던 사상이다. 오늘날 사회 진화론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지향해야할 가치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능력자가 무능력자/저능력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능력주의 논리와 결합해 현실 설명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와 1900년대 일본과 중국의 저술을 통해 개화기 한국사회에 수용되었다. 진화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알려졌으나 사회적 영향력은 사회진화론이 압도적으로 컸다. 그 내용적 특성들이 당대의 ‘사회적 수요’에 더 밀접하게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체계화되어 생물학 뿐 아니라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수많은 학문과 이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진화(evolution)라는 현상을 다윈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진화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동식물과 인간 세계에 적용한 사람은 찰스 보네트였고, 완성된 진화론을 초안했던 사람은 부퐁이었으며, 세밀화된 진화 모델을 만들어서 유기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다는 이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라마르크였다.”[1]

사회진화론은 영국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유력한 사상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 별개의 경로를 통해 발전되고 확산된 사상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시점(1859년)에 앞선 시점(1851년)에 발표된 스펜서의 저작 『사회정학(Social Statics)』은 당대 이미 알려졌던 진화 사상이 사회진화론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스펜서는 다윈의 학설을 알기 이전부터 라마르크와 맬서스의 저술을 통해 진보와 진화 개념에 대해 숙고해, 자기 나름의 이론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접하면서 자기 이론을 뒷받침할 더 많은 근거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사회진화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찰스 다윈 또한 『종의 기원』 출간 후 허버트 스펜서의 사상을 접하고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자신의 연구에 일정하게 반영하였다. 다윈의 생물학과 스펜서의 사회학 사이에 그렇게 상호작용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있었다.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의 법칙, 즉 생존경쟁의 법칙으로부터 결정적인 자극을 받고 그것을 자연의 세계에 관련시켜 진화론을 발전시켰”[2]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은 사회를 일종의 유기체로 보면서 생존경쟁을 진보를 위한 필연적 조건이자 동력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생물 유기체와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사회학 원리(The Principle of Sociology 1896)』에서 스펜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서는 구성요소들이 총체를 위해 존재하는 데 반해서, 사회에서는 총체가 개별 구성요소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란 그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결코 구성원들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3]

사회진화론에서 사회의 발전 형태는 미개사회→군사사회→산업사회로 도식화되었다. 이는 단순하고 미분화된 상태에서 복잡하고 세분화된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 진행은 신분관계에서 계약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전환되는 단계이기도 했다.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진화이고, 사회 진화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므로 거기에 국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가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단언할만큼 개인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사회의 발전을 진화의 단계와 사실상 동일시함으로써 국가의 개입을 강하게 경계했기에 자유방임주의와도 가까웠다. 그러나 스펜서 이후 사회진화론은 논자의 이념적 입장에 따라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이며 확산된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나오는 ‘생존투쟁’과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적자생존’, 두 개념의 주된 적용 대상이 개인인지 집단인지에 따라 사회진화론은 자유방임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민족주의·제국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개체·개인 간의 경쟁에 주목한 자유방임주의적 이론이었고, 키드(Benjamin Kidd)와 피어슨(Karl Pearson)의 경우는 집단·민족을 단위로 두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했다”[4]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가 급속히 팽창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세계정세에서 사회진화론은 부르주아 계급과 제국주의 이데올로그에게 논리적 설득력 뿐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까지 제공해주면서 폭발적인 파급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들은 특히 자연도태의 원리를 강조해 국가나 개인 사이의 불평등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 법칙으로 정당화했다. 또한 사회진화론은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의 학설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인종주의 인류학, 갈톤(Francis Galton)의 우생학 등과 결합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인종개선학 등으로 이론화되고, 나중에는 실질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생물학적 배제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변용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 서구열강은 제국주의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각국은 자원의 확보와 시장 확대를 위해 타 국가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충돌하고 있었으며, 국가 간의 갈등을 다루기 위한 조약과 협약 역시 활발히 체결되고 있었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중화주의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중화주의적 세계관은 특유의 천하(天下) 관념, 순환적 역사관, 예(禮)와 도(道)를 통한 위계적 국가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국가 간 조약이나 협약은 주권국가끼리의 수평적 지위를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화주의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1840년대 들어 영국(난징조약), 미국(왕샤조약), 프랑스(황푸조약) 등 구미 국가들과 잇따라 국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표면상 평등 조약이었으나 사태의 의미는 명백했다. 구미 열강의 압도적 힘 앞에 중국이 굴복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식자들은 수백 년 이상 이어지던 공고한 하나의 세계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빨리 보았고,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보다 늦었다. 서양 문명의 압도적 힘 앞에 그들은 공포를 느꼈다. 공포는 머지않아 위기감과 추격의지로 바뀌어 갔다. 역사도, 언어도, 풍습도 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이제 유사한 ‘시계’, 즉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모더니티의 시계’를 갖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당시 구미 각국에서 가장 뜨거운 사상이었으므로, 일본과 같은 ‘추격자 국가’ 역시 빠르게 수입하였다. 진화론은 서구의 최신 사상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사회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 더욱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마츠자와 히로아키(松澤弘陽)는 당시 버클과 스펜서의 책들이 많이 읽히게 된 이유에 대해, “일본의 독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19세기 중반의 유럽, 특히 영국의 문명화의 발전과 성격을 설명했던 첫 번째 이론들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더구나 이들 이론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문명화의 과학적 법칙이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일반적으로 유효한 것이며, 자연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여 일본의 미래를 위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5]

많은 사상이 그런 것처럼 사회진화론도 일본에 수용된 뒤 변용되는 과정을 거친다. 일본에 사회진화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선구자 중 한 명이면서, 량치차오(梁啓超)의 사회진화론 스승격이었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스펜서의 주장이 개인주의에 기운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표하면서, 사회진화론을 완전히 집단주의와 국가주의 쪽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우매한 대중이 민권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천황과 화족에게 절대적으로 복속해야 한다” “민족 사이의 생존 경쟁에서 이기려면 한 민족 안에서 우매한 백성과 태생적으로 열등한 여자, 무산자 등은 국민주권의 거짓된 꿈을 버리고 오로지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 등의 주장에서 가토의 이런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6]

본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 축적을 정당화하는 학설이며 개인의 역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이념과 강한 친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가토의 사회진화론은 스펜서의 그것과 달리 개인을 국가의 하위 요소로 고정시키는 한편 전근대 사회의 수장인 군주(천황)가 근대 사회의 최고 권력이며 주권자여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론에 내적 균열을 일으키면서까지 가토가 이런 주장을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종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는 사회진화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아직 구미 열강에 비해 힘이 약한 일본이 그들에게 대항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서구열강에게는 추격자이면서 아시아 식민지 약소국에게는 상대적 강자인 일본 입장에서는 다소 비일관성을 무릅쓰더라도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외부세력과 싸울 ‘사회진화론의 국가주의 판본’이 긴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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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난징조약의 체결

By Painted by Captain John Platt, Bengal Volunteers. Engraved by John Burnet. - Anne S. K. Brown Military Collection, Public Domain, Link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변용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일본보다는 중국과 유사한 형태로 수용, 변용되었다. 어느 정도 근대화를 달성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던 ‘상대적 강자’ 일본과 달리, 중국과 한국은 절대적 약자 입장이었기에 유사성을 띠게 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본래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론이었으나, 중국과 한국에서 그것은 왜 자신들이 무능한 약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었으며, 나아가 유능한 강자가 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중국에 사회진화론을 처음 번역해 소개한 지식인은 옌푸(嚴復)였으며, 이를 확산시키고 중국사회에 맞게 변용한 이는 량치차오였다. 한국에서 이 역할을 한 지식인은 유길준이었다. 유길준은 1881년 도쿄로 유학을 가서 당시 일본에 지적 열풍을 몰고 온 진화론자 에드워드 모스 교수를 알게 된다. 1883년 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도미 사절인 보빙사의 일행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모스 교수를 직접 찾아가 다윈의 진화론을 사사(師事)하였다.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유길준은 『경쟁론』 『서유견문』 등의 저서에서 한국 현실을 논하며 당시 지식인과 대중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유길준은 본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선비였지만 18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도저한 근대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전통적 세계관 속에서 경쟁은 사회 질서를 해치고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인식되곤 했지만,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유길준은 사회의 진보가 경쟁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길준은 “경려(경쟁)의 욕구가 결여된 사람은 날마다 밥을 먹고 있다 하더라도 산 시체와 같다”[7]고 주장하거나, 가난이 본인의 자질 부족에 있다고 질타하는 능력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오늘의 천하 사람 중에서 지식이 있는 이도 있으며, 지식이 없는 이도 있으며, 도덕이 있는 이도 있으며, 도덕적이지 못한 이도 있으며, 능력이 많은 사람도 있으며 ,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으며, 가난한 이도 있으며, 부자도 있는데, 그들 사이의 차이가 천양지차일뿐더러 그 지혜와 어리석음, 현명함과 불초의 다음이 천부적인 것이라. 물론 교육을 잘 받고 못 받은 것과 습관의 좋고 나쁨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달라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쟁정신의 강약으로 인해서 (빈부격차가) 생긴다는 것이라. 대체로 세상에 우부우부(愚夫愚婦)는 간신히 기한(飢寒)을 면하고, 벌레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듯이 무리로 기거하며, 잠자고 먹고 몸을 닦는 일을 전혀 모르고도 추호도 진취적이지 못하며, 어리석음과 빈곤으로써 살고 죽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경쟁정신이 없는 연고라. 가령 그들에게 경쟁의 정신이 있다 해도 그 경쟁하는 바가 심히 천누(賤陋)한 까닭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 반대로 세상에 지사(志士)와 군자(君子)된 자들이 하루마다 그 지덕(智德)을 연수(硏修)하여 하루마다 그 재예(才藝)를 연마해서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행업(行業)에 있어서 한 몸과 한 집안에 광영희복(光榮喜福)을 진(進)하는 것이며, 천하의 국가들에 유익한 자는 필경 그 경쟁할 정신이 심히 강대하고도 고원(高遠)한 것이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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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왼쪽 세 번째가 유길준), 앞줄 왼쪽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홍영식, 민영익

By 미상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9789, 링크



한편 1890년대가 되면 사회진화론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기사나 논설로 여실히 드러난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3면은 한글로, 1면은 영어로 발행되었다. 당시 세계정세에 대한 정보들이 대부분 한문이나 외국어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이 지닌 대중매체로서의 의의나 파급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창립자 서재필과 주필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통해 국가 근대화의 필요성을 계몽시키려 하였다. 전복희에 따르면 『독립신문』의 논설은 “약육강식과 강자의 권리만이 인정되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에 입각해서 국제사회의 인종이나 국가 간의 갈등과 싸움을 설명하고, 국민에게 약자의 입장에 있는 한국의 현실을 인식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당시의 세계를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의 시기로 보고 아시아에서 백인종의 세력 확대를 방어하기 위해서 황인종의 단합 내지는 아시아 연대주의를 강조”하고 있다.[9]

10년 넘게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윤치호는 정의나 도덕을 냉소하면서 힘의 논리만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한,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였다. 힘이 곧 정의이고 세계의 신(神)이었다.[10] 그는 어떤 지식인들보다 격렬한 자국혐오 정서와 선진국 선망을 드러냈다.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아무런 미래도 없다. 그들이 중국인만큼 인내심이 많은가? 아니다! 그들이 일본인처럼 의협심과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가? 아니다! …그들은 미개인이면서도 미개인의 가장 좋은 특징-용감무쌍과 호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교와 전제왕권의 폭정이라는 맷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성의 특징들을 한국에서 모두 가루 내어 없앤 것이다.”[11]

사회진화론은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 애국계몽운동과 결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화 되었다. 학교설립, 각종 캠페인과 강연, 독본(讀本)과 서적의 편찬 등 애국계몽운동의 실질적 활동에서 사회진화론은 핵심적인 이론으로 기능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인 량치차오의 글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의 생존을 역설하는『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학교 교재로도 사용[12]된 바 있다. ‘생존경쟁’과 ‘우승열패’는 금세 상품 광고와 학생들의 노래에도 등장할 만큼 대중적인 어휘가 되었다.[13][14]

일제강점기 친일 엘리트들이 현실순응적 ‘실력양성론’을 전파하는 와중에 사회진화론 역시 이론적 변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를 목도하면서 개조론이 등장하고, 개조론을 수용한 식민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연도태론 대신 인위도태론을 강화하는 형태로 사회진화론을 변형”시키게 된 것이다.[15] 이광수는 “‘문명을 갖춘 인류’는 자기의 진화를 의식적으로 행하는 ‘인위적 진화’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으로 교육과 혁명을 제시한다. 그는 이를 통해 “조선도 자각을 가지고 노력하면 개국 50년에 서양열강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된 일본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16] 박준표와 같은 사회진화론자는 인간의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를 비난하면서, 바람직한 평등요구는 “결코 계급을 타파하고 우열을 인정치 않고 차별을 철폐하려는 평등요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차별이 있고 우열이 있고 계급이 있으니 이 천연자연 본래의 차별, 우열, 계급”을 인정한 위에 이뤄지는 평등운동이 바로 “데모크라시의 본의요, 평등요구의 정신”[17]이라고 천명하였다.

인위도태론은 갈톤의 우생학에서 나온 개념으로,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유행한 ‘인종개선학’의 핵심 주장이다. 이런 인종주의 논리는 잡혼책 등의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실행되었고, 일부 조선 지식인들의 사회운동론에도 녹아들었다. 이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 인종개선학은 인종과 개인의 우열을 강조하면서 “사회개선을 위해서는 사회를 조직하는 개인의 개선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민족성의 개조는 개인성 개조의 총화”[18]라는 이광수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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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By 이광수 - 개벽 (1922년 5월호), 퍼블릭 도메인, 링크



사회진화론과 능력주의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은 피할 수 없다’는 명제는 사회진화론만이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이며, 다윈은 이에 대해 “맬서스의 교리가 적용된다”[19]고 명시한 바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해 동식물 전반에 적용되는 일반법칙이다. 생존경쟁이 불가피한 이유는 생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많은 개체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연도태가 발생해 우월한 개체의 특성과 변이는 보존되고 열등한 개체는 멸종하게 된다.

스펜서의 생존경쟁 개념과 다윈의 것은 엄밀히 따지면 내용이 달랐다. 스펜서의 생존경쟁이 ‘개체들끼리의 약육강식 투쟁’이란 의미에 가깝다면, 다윈의 생존경쟁은 ‘우연히 환경에 적합한 특성을 갖게 된 종이 살아남게 되는 과정’을 의미했고 다윈은 그래서 생존경쟁이라는 말을 “넓게 은유적 의미로 사용한 것”[20]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들은 다윈 역시 실제로는 생존경쟁 개념을 모호하게 사용했으며 때로 스펜서의 생존경쟁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박노자는 “다윈 자신도 ‘힘의 종교’의 신도이자 굴지의 인종주의자였”다면서 다윈이 “남미의 원주민들을 보면서 일기장에 “이들이 나와 같은 인류에 속한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쓰고, ‘약자 인종’이 ‘강자 인종’에게 전멸당하는 것을 ‘자연도태’로 보았다”고 말한다.[21] 결국 다윈이든 스펜서든 ‘불가피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우월한 개체’라는 식의 주장을 개진했다는 것이다.

스펜서가 만든 개념인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은 다윈을 거쳐 사회진화론으로 다시 반영되면서 ‘강자생존’ 내지는 ‘우월자생존’이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고, 약자·열등자가 도태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진화론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로 돌아가자’는 사상은 아니었다. 17세기에 나온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국가 이전의 야만적 상황으로서 자연상태를 상정하고, 일종의 문명화 과정으로서 국가 및 시민의 출현을 논하고 있다. 이런 사상사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그보다 200년 뒤에 나온 사상인 사회진화론이 국가 등장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진화론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사유이며 기본적으로 ‘진보’의 사상이다. 인간의 역사는 어쨌든 계속 진보한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19세기는 서구사회에서 그 믿음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고,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마치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필연적인 과정, 마치 자연사(自然史)적 과정처럼 이해되었던 것이다. 당대에 진화론 류의 사상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엄청난 열광을 몰고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인간의 진보(progress)는 자연의 진화(evolution)와 동일시되었다. 그러한 동일시는 사회 발전에 대한 목적론적 인식으로 이어졌다. 진화론류 사상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위협을 느끼던 부르주아 계급에게 현실의 권력 관계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방어논리가 되어주는 한편, 역사발전 단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서술에서 볼 수 있듯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강력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이러한 단선적 진보사관, 진보와 진화를 동일시하는 오류 등은 20세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22]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통해 우생학에 강하게 결속된 사회진화론은 학문적 입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이념들에 침윤되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력주의가 그 중 한 예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분배적 정의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며, 그렇기에 일종의 진보적 이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래 그것은 능력에 따른 지배(merit/cracy)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응분(desert)의 보상체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은 당연시되곤 한다. 가령 능력이 열등한 이가 능력이 우월한 이와 같은 몫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비효율이자 부정의한 사태로 강하게 비난받는다.

빈민구제나 그들에 대한 복지정책은 자연도태에 개입하는 맹목적인 행위라 비난한 과거의 맬서스주의자들처럼, 오늘날 능력주의자들 상당수는 여전히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에 대한 지원은 부정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진화론과 진화론에서 논의되는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은 능력주의의 기저조건을 형성한다. 우열 구분의 자명성과 우열 경쟁의 항구적 존재 상황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능력주의는 합리적 행동지침이자 필연적 당위가 되기 때문이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전복희,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 한울, 1996, 19쪽 
[2] Hans-Ulrich Wehler, “Sozialdarwinismus im expandierenden Industriestaat,” in Immanuel Geiss & Bernd Jürgen Wendt(eds.),. Deutschland in der Weltpolitik des 19. und 20. Jahrhunderts, Düsseldorf, 1974, S137; 전복희, 같은 책, 20쪽에서 재인용 
[3] 박영은, 『사회학 고전연구』, 백의, 1995, 143쪽 
[4] 염운옥, 「영국의 식민사상과 사회진화론」, 강만길 외,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선인, 2004. 53쪽 
[5] Matsuzawa Hiroaki, 『Varieties of Bunmei Ron (Theories of Civilization)』, in Hilary Conroy, Sandra T.W. Davis and Wayne Patterson (eds) Japan in Transition: Thought and Action in the Meiji Era, 1868–1912, London and Toronto: 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1984, p210; 전복희, 같은 책, 47쪽에서 재인용 
[6] 加藤弘之, 『強者の権利の競争』 哲学書院, 1893; 박노자, 같은 책, 76쪽에서 재인용 
[7] 유길준, 『서유견문』, 대양서적, 1975, 388쪽 
[8] 유길준, 『유길준 전집』 제4권 48-49쪽; 박노자, 같은 책, 233쪽에서 재인용 
[9] 전복희, 같은 책, 118 
[10] 국사편찬위원회 편, 『Yun Chi-ho’s Diary』, Vol.2, 1890.2.14., pp19-20; 전복희, 같은 책, 127쪽에서 재인용 
[11] 국사편찬위원회 편, 『Yun Chi-ho’s Diary』, Vol.3, 1894.11.1., pp349-350; 박노자, 같은 책, 249쪽에서 재인용 
[12] 이광린, 『한국개화사상사연구』, 일조각, 1979, 263쪽 
[13] 1896년 겐노간(健腦丸) 광고는 “귀중한 뇌가 건강하지 않으면 日進月步 優勝劣敗의 세상을 살아가며 각 사업에 종사하지 못한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하려 이보다 불리한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야마자키 미쓰오 『일본의 명약』; 권창규, 『상품의 시대』, 민음사, 2014, 106쪽에서 재인용 
[14] 서우사범학교 학도가에는 “...生存競爭當此시대(時代)에/ 國家興亡이니게달녓네 ... 六大洲大陸의 形便살피니 弱肉强食과 優勝劣敗라/” 『西友』 4호, 1907, 39쪽; 전복희, 같은 책, 140쪽에서 재인용
[15] 개조론은 1차 세계 대전 직후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지식인들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세계질서를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개편하자는 주장이었다; 박성진, 『사회진화론과 식민지 사회사상』, 2003, 127쪽 
[16] 이광수, 「신생활론」, 『이광수전집』 제10권, 우신사, 1979, 326쪽 
[17] 박준표, 현대청년수양독본, 영창서관, 1923, 229-232쪽; 박성진, 같은 책, 164쪽에서 재인용 
[18] 이광수, 「민족개조론」, 『이광수전집』 제10권, 우신사, 1979, 128쪽 
[19]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1859)』, Simon & Schuster, 2013, p88 
[20] Ibid., p87 
[21] George W. Stocking. Jr.,『Victorian Anthropology』. The Free Press. 1987. pp102-109; 박노자, 같은 책, 64쪽에서 재인용 
[22] 예컨대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저서 『Full House: The Spread of Excellence from Plato to Darwin(1996)』에서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다양성의 증가는 복잡성의 증가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여러 기생생물의 경우처럼 점점 단순화되며 환경에 적응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