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이 리틀 텔레비전

     

스트리밍이나 개인방송은커녕 유튜브가 창립되기도 전이었던 2000년대 초반, 텔레비전은 곧 대중문화였고 대중문화는 곧 텔레비전이었다. 이제 막 집집마다 베란다에 '접시'가 달리기 시작했지만 방송의 패권은 완전히 지상파 3사에게 있었다.

아직은 라디오시대

《미스터케이》 2001년 11월호의 테마는 '라디오'였다. 〈텐텐클럽〉 DJ 1주년을 맞은 김동완의 인터뷰, 〈윤도현의 두 시의 데이트〉 동호회 취재기를 비롯해 라디오를 주제로 한 다양한 기획 콘텐츠가 실렸다. 《미스터케이》의 캐릭터들도 라디오 DJ로 변신했다. '빤쯔'는 또 다른 캐릭터 '발렌'과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포타토'는 '음악살롱' DJ가 되어 엇갈린 우정과 사랑 이야기가 담긴 사연을 소개했다. '소다미'는 현실의 DJ들이 그러하듯 생일을 맞은 청취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하를 전했다.

특히 '57분 연애교통 정보', '뉴스속보', '1분 뉴스' 등으로 짤막하게 삽입된 《미스터케이》의 캐릭터 그룹 '돌클럽'의 이야기는 무형의 음성 매체를 지면 위에 옮겨 담는 디테일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편집부는 다음해 창간 4주년 특별호에서 이 특집을 회상하며 "이 얼마나 뛰어난 아이디어인가!"라며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라디오' 테마에서 복고 또는 레트로의 문법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라디오는 추억의 일부가 아니라 시의적인 매체였고, TV와는 또 다른 영역에서 동시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영역이란, 다름 아닌 '감수성'의 영역이었다. 위의 '라디오' 특집에서 기획 지면을 여는 페이지에는 아웃포커스로 찍은 라디오의 사진 위에 다음과 같은 손 글씨가 적혀 있다. 라디오에 도착하는 사연의 전형과도 같은 이 짧은 글을 통해 그 감수성의 문법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나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이렇게 사연 보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옵니다. 미련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2층집 큰 유리창 위로 비친 모습―. 처음 보았던 그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렇게도 원했는데… 아무래도 우린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지나쳐버린 존재이기에 더욱 더 아쉬움이 큰지도 모르겠네요. 신청곡은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입니다.

[그림 1] 《미스터케이》 2001년 11월호의 '라디오' 테마

《미스터케이》의 뒷면 표지는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의 화보로 꾸려졌다. 동시에 해당 연예인의 인터뷰나 현장 취재가 연예 면 기사로 실렸다. 대부분은 10대에게 인기가 높은 아이돌 스타로 이루어졌는데, 그 달의 메인 이슈로 취급될 만한 아이돌의 주요 일정은 크게 네 가지 정도였다. 즉 앨범 컴백, 콘서트·팬미팅·쇼케이스 등 공연 소식, 교복 광고 촬영, 그리고 라디오 DJ를 맡았을 때였다. 앞의 세 가지와 동등한 비중을 가질 만큼 라디오는 10대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아무리 TV의 시대라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TV 앞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학생의 경우, 10대 청소년이 사실상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매체는 라디오였다.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책상 앞에 앉아야 하는 10대들에게 라디오는 다정한 공부 메이트이자 세상과의 연결감을 확인시켜주는 매연물이었다. 듣는 순간 세뇌 당한다는 마성의 CM송을 보유한 모 사이버대학을 비롯해 각종 대학교 광고가 라디오에 대거 포진해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매일 두 시간씩 들어야 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에, 누가 라디오 DJ를 맡는가 하는 것은 뉴스데스크 앵커 인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유서 깊은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부터 〈키스 더 라디오〉, 〈텐텐클럽〉, 〈볼륨을 높여요〉 등 늦은 저녁 라디오 프로그램들에는 10~20대가 사랑하는 스타나 방송인들이 DJ로 배치되었고, 여기에 1·2세대의 인기 아이돌 멤버들이 제법 포함되었다. 아침 라디오는 출근하는 어른들이 점유했지만, 한밤중의 라디오는 청춘을 위한 것이었다.

요즘도 밀레니얼 세대에게 인지도가 높은 DJ들이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10대들도 예전만큼 라디오를 듣는지, 혹은 밀레니얼이 마지막 라디오 청취자로 남게 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라디오 방송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과 거기에 담긴 감수성은 큰 변화 없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라디오가 아주 천천히 추억의 페이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동안 텔레비전은 매일매일이 격동의 시기였다.

[그림 2] 2002년 8월호, SBS ‘JTL의 기쁜 우리 젊은 날’ 인터뷰기사와 뒷면 표지.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 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90년대 초반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온 VHS 테이프를 틀면 어김없이 나오던 이 ‘건전 광고’는 그때 당시 영상매체에 대해 국가가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무서운 재앙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불량‧불법 비디오를 척결하면 맑고 밝은 청소년 문화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낙관 역시 읽을 수 있다. 다소 무섭게 느껴지는 강렬한 내레이션과 어둡고 자극적인 애니메이션의 효과였는지, 당시 어린이들은 마치 어른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듯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를 자동으로 외웠다.

이 영상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유튜브와 개인방송에서 어떻게 활약하고 있는지를 보았다면, 그때의 문화부 직원들은 어떤 기분일까?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불량 비디오'를 시청하지 말라고 그렇게 뜯어 말렸더니 아예 직접 나서서 생산하며 낄낄거리고 있다면서 혈압 강하제를 삼킬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상상했던 미디어―디스토피아는 문화부 공무원들의 우려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지만, 영상매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비슷한 생각이 밑바탕이 깔려 있었다. 디스토피아 장치의 정전이 된 오웰의 '텔레스크린'처럼, 텔레비전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시청자는 그것을 수용한다. 이러한 일방향적 정보 유통의 이미지에서 오웰은 전체주의를 보았고, 문화부는 통제의 필요성을 보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텔레비전에 대한 경계는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TV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일 테니 말이다. '바보상자' 텔레비전에 대한 공포는 영상 매체의 영향력에 대한 공포이기도 했지만, 그 중독성에 대한 공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이 늘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 3] ‘호환, 마마’ 영상을 보면 당시 문화부 공무원들이 생각하던 불건전과 건전의 경계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부(문화체육관광부)

텔레비전을 위한 변명

스트리밍이나 개인방송은커녕 유튜브가 창립되기도 전이었던 2000년대 초반, 텔레비전은 곧 대중문화였고 대중문화는 곧 텔레비전이었다. 이제 막 집집마다 베란다에 '접시'가 달리기 시작했지만 방송의 패권은 완전히 지상파 3사에게 있었다.

지상파 방송은 가장 중요하며 거의 유일한 대중매체라는 사명에 부응해, 이제 막 시작된 '민주적인' 21세기 방송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바야흐로 교양국과 예능국의 전성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이름값을 해내던 문화방송의 행보가 독보적이었다. 특히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장수한 프로그램 〈느낌표〉는 지금으로서는 비현실적일 만큼 강한 공익성으로 승부했다.

한낱 방송 프로그램의 캠페인으로 전국 고등학교에서 시행되던 '0교시'가 폐지되는가 하면, 지하철에서는 온 서울시민이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가 선정한 똑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강사가 되어 길거리에서 강연을 했고,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시력을 찾아주던 〈눈을 떠요〉를 보고서는 전 국민이 눈시울을 붉히며 장기기증서약서에 서명했다. 급기야 우리는 남북 어린이들이 '쌍둥이 스튜디오'에 나와 함께 문제를 푸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브라운관 속은 가히 하루하루가 감동이었다. IMF도 '끝났고', 평양에 다녀온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다시금 희망이 돌아온 듯한 벨 에포크 같은 나날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다보면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은 내 모습을 보니, 나도 50년 쯤 뒤에는 '그때가 좋았다'며 추억 보정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느닷없이 엄습한다.

[그림 4] MBC의 역사에 길이 남을 〈느낌표〉 ⓒ문화방송

물론 그 시기 방송에서도 어두운 면면은 존재했다. 당장 떠오르는 개그 프로그램들만 해도 당시에는 문제의식 없이 수용했던 광활한 차별과 혐오의 온상이었으니 말이다. 〈느낌표〉 또한 다소 계몽적이거나 시혜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착한 방송'의 전형이 그렇게나 범국민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시대는 아마도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언론 권력의 분산은 놀랍게도 콘텐츠의 다양성과 획일성을 동시에 불러왔다. 경쟁 채널이 많아지면서 각 방송사는 트렌디한 아이템을 따라잡기에 급급해졌고, 스타 PD들은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DNA를 산포했다. TV 속 영향력의 분산에 이어, 콘텐츠의 주도권이 TV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청자의 눈과 자본의 흐름을 끌어오기 위해 각양각색의 영상플랫폼들이 각축을 벌이는 중이다. 이에 2010년대는 MSG를 넘어 캡사이신을 쏟아 넣은 콘텐츠의 시대가 되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그 대표주자가 무엇인지를 확신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밀레니얼 세대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 해 온, 어쩌면 인생의 동반자, 대중매체의 얼굴, '아이돌' 이야기를 먼저 해볼 것이다.


'오빠'에서 '내 새끼'로

《미스터케이》는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의 활동기에 탄생하여 신화, god와 함께 전성기를 보냈다. 《미스터케이》의 인기가 한 풀 꺾이기 직전에 동방신기가 데뷔했으니, 1·2·3세대 아이돌과 모두 함께한 셈이다. 20세기 초 MGM으로 대표되는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스타 시스템을 창안했다면, 21세기 초반 한국의 대형기획사들은 아이돌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 10대 연예인 팬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4년까지 발행되었던 중앙미디어의 청소년 대상 연예전문잡지 《하이틴》에 실린 다음 기사를 보면 몇 년 사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취재기사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하이틴》은 연예전문잡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팬클럽에 가입하여 팬덤 활동을 하는 모습을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KBS에서 방영되었던 만화영화 〈영심이〉에서도 중학생인 '영심이'가 아이돌 가수에게 빠져 있는 모습을 다소 한심하고 철없는 모습으로 그렸던 것 역시 이와 같은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팬덤 문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변화한 것은 90년대에 10대였던 청소년 자신이 어른이 되어 대중문화 생산―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부터였다. 특히 《미스터케이》의 경우에는 김성수 편집장을 포함한 편집부가 대부분이 20대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보다 몇 걸음 더 빨리 친화적인 논조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니 지금 토니 오빠야랑 니랑 비교를 하나? 나랑 토니오빠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아가페적인 사랑! 플라토닉 러브라고! 어따 비교를 하노!"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시원'이 남자친구 '윤제'에게)
《미스터케이》의 독자들이 보낸 사연이나 〈파파라치 파파라쵸〉[1] 코너에 직접 찍은 스타의 사진과 함께 적어 보낸 글을 보면, 10대였던 밀레니얼 세대는 아이돌을 꼬박꼬박 '언니', '오빠'라고 불렀다. 그때까지 아이돌은 순전한 동경을 받는 우상이었다. 지금의 아이돌은 팬들의 '보호'를 받는다. 밀레니얼은 청소년기의 덕질 대상이었던 언니 오빠들보다, 또는 본인보다도 어린 아이돌을 '내 새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배도 가슴도 아닌, '통장으로 낳은 내 새끼' 말이다.


팬덤 지형의 변화 ― '뒷바라지'하는 팬들

1세대~3세대 팬들이 '탈덕'과 '입덕'을 반복하며 계속 팬덤 문화에 잔류하면서, 대부분이 10대로 이루어졌던 과거와는 달리 팬덤의 얼굴은 경제력과 행동력으로 무장한 20~30대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아직까지 팬덤 문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세력이 바로 밀레니얼이며, 팬덤의 전반적인 분위기 또한 밀레니얼의 태도에서 영향을 받는다. 아이돌을 대하는 밀레니얼의 태도는 동경을 지나 유사연애로, 그리고 양육으로 흘러왔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밀레니얼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짐작컨대 발단은 소셜미디어, 특히 트위터였다. 우선 TV에서만 보던 아이돌이 싸이월드를 거쳐 트위터, 나중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더 가까운 일상으로 다가왔다. 실시간으로 간략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 최적화된 소셜미디어인 트위터를 중심으로 팬덤 문화가 재편되면서, 공식 팬클럽이나 팬카페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대신 개개인의 팬들이 영향력의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서클'보다는 공론장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한 팬덤은 자발적인 서포트와 연대활동을 통해 소속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까지 메우기 시작했다. 팬들에 대한 소속사의 의존도는 알게 모르게 높아졌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팬들의 적극성은 투표, 음반 판매량, 각종 광고 게시 등에 이르기까지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었다. 아이돌을 동경만 했던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아이돌을 키우고 돌보는 시대에 와서는 필수적인 뒷바라지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아이돌 소비 방식은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남성 아이돌 팬덤, 혹은 여성 아이돌이더라도 여성 팬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다. 여성 아이돌에 대한 남성 팬덤의 소비는 이와 판이하게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에서는 남성 팬덤의 경향성과 미디어가 이를 활용하는 방식은 완전히 배제한다.[2] )


계획적 과열화의 말로

CJ ENM의 음악채널 엠넷(Mnet)은 바로 이 시점에서 끼어들었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일본에서 건너온 'AKB-48'식 투표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내 픽pick'을 데뷔시키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도 불사할 수 있는 한국적 팬 문화 없이는 흥행이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아이돌의 성공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이제 대형 기획사의 수준 높은 기획과 마케팅이 아니라, '국민 프로듀서'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팬들의 서포트 역량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작된 〈프로듀스 101〉은 앞서 엠넷이 제작했던 성공작 〈슈퍼스타K〉와는 타깃부터가 달랐다. 〈슈퍼스타K〉는 구체적인 타깃 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간단한 문자투표를 요구했지만, 〈프로듀스 101〉은 기본적인 덕후의 소양을 가진 예비 팬덤을 상대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장르 특성상 확장성은 떨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아이돌에 친숙하고 진입장벽이 낮은 밀레니얼 세대의 '행동주의'는 기대 이상으로 빛을 발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인이란 지인을 총동원해 투표 참여를 부탁했고, 지하철역에는 예쁘게 찍은 연습생의 사진 옆에 '국민 프로듀서님~'으로 시작해 '투표해 주세요'로 끝나는 문구를 적어 광고를 내걸었다.

제작진은 팬들에게서 더 많은 적극성을 이끌어내고, 대중의 주목을 받을 만한 노이즈를 만들기 위해 '악마의 편집'과 잔혹한 진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피로도가 쌓였고, 몇 시즌 되지 않아 대중의 관심이 먼저 빠르게 식어 갔다. 프로그램의 생명력은 이미 다한 듯했지만, 지지하는 연습생의 데뷔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코어 팬덤이 인공호흡으로 숨을 붙여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로듀스 101〉 제작진의 가장 큰 잘못은 물론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그 다음으로 큰 잘못은 그들이 편승하고자 했던, 팬덤의 행동주의를 얕잡아보았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 적극적인 시청자들을 너무 깊숙이 끌어들였고, 지나친 고관여층으로 만들었으며, 거리유지에 실패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만든 시스템에 모든 것을 건 바로 그 팬덤의 분노로 무너져 내렸다.

[그림 5] Mnet은 올해부터 ‘We Are K-POP’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왔다. ⓒCJ ENM

방송을 통한 아이돌 데뷔 오디션의 시초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2001년부터 2002년까지 MBC에서 방영된 〈악동클럽〉이 나온다. 〈악동클럽〉은 시청자들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지만, 당시 시청자들이 직접 투표한 것은 그룹 이름과 타이틀곡 정도였다. 데뷔조가 되기 위한 연습생들의 서바이벌은 완전히 브라운관 안의 영역이었다. 데뷔 후 첫 타이틀곡으로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3위 안에 들어야 그룹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는 독한 조건도 지금 보면 귀여운 수준이다.

대중이든 팬이든, 프로그램과 같은 그룹명으로 데뷔한 '악동클럽'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응원뿐이었다. 누구도 시청자에게 그 이상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엄청난 화력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지도 않았다.

모 의원이 '취업사기' 프레임으로 이슈파이팅에 나섰던 것처럼, 〈프로듀스 101〉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많고도 많아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올 것이다. 그중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문제는, 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관여는 어디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라야 적당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매체 환경의 지각변동을 마주한 방송은 그 영향력을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는 중이고, 거기에는 시청자 참여 유도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과정에는 분명 성과에 앞서 지켜져야 할 선들이 있을 것이다. 한 번 넘은 선, 이미 낸 상처를 되돌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림 6] 텔레비전을 소재로 한 《미스터케이》의 다양한 지면들

오늘의 텔레비전

거꾸로 보는 TV는 여러분이 평가합니다. 지금 접속하세요. 특정 프로의 의견보다는 다양한 프로에 대한 냉철한 평을 올려 주세요.[3]
《미스터케이》의 방송 리뷰 코너 〈거꾸로 보는 TV〉를 보다보면, 도대체 그 때의 청소년들은 뭘 먹고 다녔기에 저렇게 건전한 언어와 시선으로 방송을 소비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애들은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TV를 보고 있을까? 지금의 텔레비전에, 밀레니얼 세대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웬만한 세상사가 그러하듯, 방송과 그 안의 대중문화는 먼 과거의 예상과도, 가까운 과거의 예측과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 방송 밖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 변화가 방송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주거 취약 계층에게 꼭 맞는 환상적인 집을 선물하던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를 보며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꾸던 밀레니얼은, 이제 연예인들이 부동산 중개인이 되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예산에 맞는 집구하기'를 돕는 〈구해줘! 홈즈〉를 보게 되었다. 방송은 꿈과 희망의 온기 대신 현실의 매콤하고 퍼석한 추위를 판다. 물론 전자에도 부작용이 있었고, 후자에도 순기능이 있기에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낭만화할 수는 없다. 또한 도전도 모험도 하지 말고 라디오처럼 잔잔하게 머물러만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방송은 어떤 측면에서는 퇴보하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진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최은별 / 디자인문화연구자 




[1] 직접 찍은 스타의 사진(요즘 말로 '직찍')을 우편으로 보내 다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코너였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스타의 엽기적인 모습, 재밌는 모습들을 찍은 사진이 있다면 애독자 엽서의 사연과 함께 서슴지 말고 미스터케이로 보내 주세요. 여러분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디지털카메라가 상용화되기 전이라 인화사진이 퍽 귀한 때였지만, 친구 또는 아는 언니에게 받았다는 '한 장밖에 없는 사진'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2] 참고: 강지현, 노혜경. (2019). 아이돌 팬 특권의식의 성차: 팬쉽, 관계 만족도, 관계유지의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문화』. Vol.34(1). 5-38. 
[3] 〈거꾸로 보는 TV〉 코너의 설명글. 독자들이 《미스터케이》 홈페이지에 올린 방송 프로그램 시청 소감을 모은 리뷰 코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