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와 교양, 그 뜨거운 열망

     

소설의 의미를 극히 피상적인 차원에서밖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유명한 작품의 목록은 줄줄 나열하는 식민지 독서인의 모습은 교양이라는 것이 어떻게 소비되고 유통되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제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에 대한 개인적 저항’이라는 의미마저 완전히 탈각된 채 온전히 지위 경쟁의 한 양태로서, 즉 교양이 일종의 물신이 된 ‘교양물신주의’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입신출세주의와 교양물신주의

‘입신(立身)’이라는 말은 본래 『효경(孝經)』에서 비롯한 말로 ‘자기 몸을 바르게 간수함’을 의미한다.[1] 즉, 전근대 신분 사회에서 유교 덕목인 ‘효’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반면 ‘입신출세(立身出世)’는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어휘로 그 의미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한 사회적 지위 상승’이다. ‘입신출세주의’는 그러한 지위 상승을 지향하는 태도나 이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다소간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으로 수입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봉건적 신분 질서를 벗어나기 시작한 사회에서 개인이 부와 명성을 다투어 추구하게 되는 건 필연적이다. 제도와 문화가 급변하는 만큼 기대 지평과 경험 공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욕망도 그 변화에 맞춰 새롭게 주조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추동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입신출세주의는 근대일본인의 정신적 원동력”[2]이라거나 “근대 이래 한국 사회에서 근대 주체를 형성한 주된 동력은 입신출세 욕망”[3]이고 “근대는 모든 개인들에게 ‘입신’과 ‘출세’를 요구”한다는 주장[4] 등은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입신출세주의의 가능 조건이었던 근대적 교육제도는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점차 체계화되어 현재 대한민국에 이어졌다. 경쟁시험에 기초하여 학교 간 위계 서열을 만들어낸 교육제도는 훗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학력주의(學歷主義)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학력주의는 입신출세주의의 한 부분으로서, ‘학교의 권위를 매개로 한 입신출세주의’라 표현할 수 있다. 입신출세욕망은 진학열과 교육열 등 학력주의적 욕망과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편의상 여기서는 학력주의와 구분한 입신출세주의만을 다룬다. 학력주의는 어떤 것보다 능력주의와 가장 밀접한 이념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근대 시기 일본의 교양주의(敎養主義)는 입신출세주의의 안티테제로서 나타났다. 여기서의 ‘교양’은 중국, 한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유학 경전 및 고전문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유럽의 인문고전에 대한 교양(Bildung)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모로하시 테츠지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서 ‘교양자손(敎養子孫)’이라는 말이 『후한서(後漢書)』에 나온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때의 교양은 ‘자손을 가르치고 기르다’의 뜻으로 현대 일본의 ‘교양’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5]

근대 이후 한국의 ‘교양’과 ‘교양주의’ 개념은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의미와 수용의 맥락 역시 복제하듯 그대로 답습되었다.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도쿄제국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교양주의가 퍼져나갔듯이, 경성제국대학교의 교양주의 역시 거의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입신출세주의의 반작용이자 그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 교양주의는 처음부터 강한 엘리트주의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고, 예외적 경우들을 제외하면 단지 그 노골성을 완화해주는 문화적 장신구로 기능하게 된다. 교양주의는 이내 ‘교양물신주의(敎養物神主義)’로 변형한다. 교양이 출세와 지위경쟁의 도구이자 물신(fetish)이 된 것이다. 교양주의는 그렇게 한국에서 입신출세주의와 더욱 강하게 일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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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 Morohashi Hakushi Koki Shukuga Kinen Ronbunshū (Essays presented to Mr. Morohashi in honour of his 70th birthday). Morohashi Hakushi Koki Shukuga Kinen Kai, 1953., Public Domain, Link


입신출세주의의 가능 조건

여기서는 먼저 입신출세주의의 가능 조건으로서 제도와 담론을 살피기로 한다. 제도적 변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신분제도의 폐지 및 대중교육의 본격화다. 입신출세주의가 가능하려면 최소한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형식적 평등이 필요하다. 과거제도가 아무리 평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담지된 제도였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양인(良人) 신분에 한한 것이었다. 노예계급이라 할 수 있는 천인(賤人) 계층에게는 시험자격이 원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였다.

갑오개혁은 외세를 등에 업은 일부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평가되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신분제 폐지와 같은 중대한 사회변화를 엘리트의 결단으로 환원해버릴 수는 없다. 당시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 역시 갑오개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그러한 영향의 대표적 사례다. 동학농민군은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신분제도의 개혁을 골자로 한 폐정 개혁안을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 이미 신분 질서는 급속히 와해되고 있었으며, 갑오개혁 이전부터 신분 상승 열망은 사회 전체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묘사하면서 “사회의 유동화가 격렬해지는 근대에 들어와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고 설명한다.[6]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신분제의 철폐는 단절적 사건으로 도래했다기보다 오랫동안 누적된 과정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신분제 철폐와 더불어 입신출세주의의 제도적 가능 조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근대적 학교·교육제도의 도입이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4년 9월 2일, 중앙교육행정기관인 학무아문(學務衙門)은 ‘학문아무고시’를 발표한다. 이 고시는 한국 사회에서 국민보통교육, 즉 대중교육의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건대 시국은 크게 바뀌었다. 모든 제도가 다 함께 새로워져야 하지만 영재의 교육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 그러므로 본 아문에서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세워 먼저 서울에 행하려 하니, 위로 공경대부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서민의 준수한 자제에 이르기까지 다 이 학교에 들어와 경서(經書),자전(子傳),육예(六藝),백가(百家)의 학문을 배워 아침에 외고 저녁에 익히도록 하라. 그리하여 장차 일을 알아 시대를 구하고 내수(內修)와 외교에 각각 크게 쓰고자 하니, 진실로 좋은 기회이다. 앞으로 대학교와 전문학교도 차례로 세우려 한다. 무릇 사방의 학자들은 책을 가지고 달려와 전심으로 가르침을 받들어 성세(聖世)를 이루려는 뜻을 버리지 말라.[7]

1894년 공포된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 선거조례(選擧條例)는 시험에 의한 경쟁적 선발을 제도화했다. 유교 경전이 아닌 신학문의 비중이 커졌다. 예컨대 1899년 설립된 관립의학교에는 중인 집안 출신이 다수였으나 예조와 공조판서를 지낸 명문 세도가의 자제들도 상당히 진학해 당대의 신학문인 서양의학을 배웠다.[8]

제도적 조건이 구비된다고 해서 바로 입신출세주의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입신출세의 욕망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 욕망의 실현이 공적 의의와 사적 효용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어질 때, 그 욕망은 비로소 구성원들 다수가 공유하거나 최소한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국 일종의 정당화 담론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며 그런 담론들은 인쇄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유통됨으로써 공론장의 ‘시민권’을 획득한다.

입신출세주의의 담론적 조건이 형성되는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입신출세, 입신출세주의라는 말이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근대적 지식, 사상, 제도가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입신출세주의와 개념쌍을 이루는 교양(물신)주의에 있어서도 역시 일본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입신출세주의를 상징하는 텍스트는 사무엘 스마일즈의 『자조론(Self-Help)』이다. 이 책은 1859년 영국에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른바 ‘자기계발서의 원조 격’이라 일컬어지며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스마일즈는 의사로 개업한 뒤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다가, 나중에는 직업마저 포기하고 본격적인 정치개혁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몇몇 뼈아픈 경험을 하며 ‘정치개혁과 사회개혁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고 절망하고, 사회정치적 운동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끊는다. 그리하여 개인개혁, 즉 자조(Self-Help)만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고 주장하며 활발히 강연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 강연 내용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 『자조론(Self-Help)』이었다.

‘빈곤은 온전히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 때문’이라는 스마일즈의 주장은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것이었기에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대중의 정치적 저항을 억압하면서도 그들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추출하고 싶었던 세력들, 즉 노동규율에 대한 탈정치적 정당화 논리가 절실히 필요했던 여러 국가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에게도 이 책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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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자조론(Self-Help)』은 『서국입지편(西國立志篇)』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번역 소개되며 엄청난 호응을 얻었으며, 1905년에는 『자조론(自助論)』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1900년대 당시 일본에는 입신출세를 테마로 하는 수많은 잡지가 간행됐다. 1902년 창간된 『성공(成功)』이라는 잡지에는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 구체적 사례와 함께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 『자조론』은 1906년 『조양보(朝陽報)』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서 소개된 ‘자조’는 개인의 입신출세라기보다 국가의 자조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즉, 부강한 나라가 되자는 이야기로 각색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자조라는 의미로 번역된 것은 1918년 최남선에 의해서였는데, 이때도 완역이 아닌 부분 번역이었다.[9]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입신출세주의 텍스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 『청춘』 『소년』 등의 잡지에서는 외국의 입지전적 인물인 카네기, 록펠러, 워싱턴 등의 삶이 청년 세대가 마땅히 따라야 할 롤모델로 제시되었다. 그 대부분이 성공론, 수양론, 노력론의 형태로서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했다’는 서사의 반복이었다.


동전의 뒷면: 교양주의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이다. 교양주의는 일본의 제국대학 출신과 이른바 구제(舊制)고등학교 학생들이라는 극소수 엘리트 집단을 중심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입신출세주의와 대조를 보인다.

일본 교양주의의 효시를 흔히 ‘다이쇼 교양주의’라고 부른다. 다이쇼(大正)는 일본의 제123대 텐노인 요시히토(嘉仁, 1879-1926)의 연호로, 그 기간은 1912년부터 1926년까지로 매우 짧았으나 당시 일본 전역에서 민주주의적 풍조가 고양되었으므로 “다이쇼 데모크라시”[10]라고 일컬어졌다. 다이쇼 교양주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인문주의자, 학생들의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에서 1886년 제국대학제도가 설립되면서 입신출세의 경로에서 가장 앞선, 혹은 정점에 서는 집단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제국대학의 예비교인 이른바 구제고교[11] 학생들은 치열한 시험경쟁을 통과해 제국대학의 독점적 입학 자격을 부여받은 만큼 제국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학력 귀족’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초창기 구제고교의 문화는 ‘반카라(バンカラ, 蛮カラ)’라는 말로 요약된다. 반카라는 ‘야만(野蛮)’과 ‘하이카라(ハイカラ)’의 합성어로 동시기에 유행한 ‘서양 풍조에 물든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인 ‘하이카라(ハイカラ)’의 상대어다. 반카라 문화는 고성방가, 기숙사에서의 방뇨와 후배에 대한 린치 등 폭력적 일탈 행위로 특징지어지는데, 러일전쟁을 전후해서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 경향이 노골화되었다.

그러나 반카라 문화에 대한 내부의 반감은 구제고교 내부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제국대학 출신들이 주도한 다이쇼 교양주의의 영향으로 고교생들 사이에도 교양주의는 빠르게 확산되는 중이었다. 입신출세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해 구제고교에 들어왔지만, 학생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점차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반카라 문화 전통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교양주의는 점차 논리를 더해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적 또래문화로 발전한다. “입신출세가 당연시되는 일고(一高) 학생에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자신이 진정 그것을 원하는가’라는 자문에서 출발하여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절실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입신출세를 거부한 다음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그리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12]

교양주의는 반카라 문화에 대한 구별 짓기를 넘어서는 집단적 저항, 즉 입신출세주의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진 못했다. 노동계급 등 다른 집단과의 연대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그들 자신이 치열한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된 학력 엘리트이다 보니 지적 우열에 따라 지위와 권리가 분배되어야 한다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근본적 고민이 없었던 면도 있었다. 다카다 리에코는 당시 교양주의가 입신출세주의를 개인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특권화하는 식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교양주의의 탄생배경에 대해 기술한 글에서 강조되는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류의 입신출세주의의 종언과 청년의 목표 상실이라는 것이다. 다소 안정되기 시작한 일본 사회에서 고학력 청년들이, 일찍이 가졌던 출세주의를 가지지 않게 되고 그 대신에 오히려 출세 따위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특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13]

일본이 서구로부터 수입해온 ‘교양’ 개념을 돌아보면, 교양주의가 엘리트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일지 모른다. 매슈 아놀드에 따르면 ‘교양’이란 “옥스포드의 신념과 전통을 오롯이 견지”[14]하는 “옥스포드의 감성”[15]이며 “위대함과 복리가 부유하다는 것으로 입증된다고 믿는” “속물들”[16]인 신흥계급의 ‘무질서’에 대항해 엘리트계급이 내세우는 윤리인 것이다. 교양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찬란한 인문고전의 정신과 달리 현실세계에서 교양은 단지 계급적 차별의 표지로 활용되기 쉬웠다.


한국의 교양물신주의

입신출세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학력위계시스템은 거의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작은 도쿄제국대학’이라 할만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에게 도쿄제국대학은 극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시험 성적으로 일본인 경쟁자들을 압도했다는 ‘당대의 수재’ 유진오는 자신의 열등감과 속물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동기는 옛날 ‘유럽’의 학자나 예술가들이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를 갔다 와야 목의 때가 떨어진 것처럼 느끼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하이델베르크’나 ‘옥스포드’를 다녀와야 학문이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할까. 또는 당나라 현종이 서역을 찾고, 의상이나 원효가 당나라를 찾던 것에도 비할 수 있을는지.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그만하면 훌륭한 것이었다 할 수 있지만 결국 경성제대는 일본의 식민지대학이요 그 권위의 본거지는 일본이요 동경이었기 때문에 경성제대 출신자로서는 한번 그 본거지를 찾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남직도 한 일이다.[17]

교양주의 역시 한국의 ‘학력 귀족’들에게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경성제국대학을 지배하던 이념은 바로 교양주의였고, 이러한 교양주의를 몸에 익힌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되던 시기가 바로 1930년대 초반”이었다.[18] 유진오 같은 식민지 엘리트 청년들은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사유의 성숙 인양 묘사했지만, 사실 “그것은 식민지 본국에서 교양의 내용이 변화한 것을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19]

다이쇼 교양주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쨌든 사회의 집단적 실천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양주의에는 그러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교양은 빨리 습득해야 할 강박적 목표였고, 그랬기에 교양은 자신의 능력과 자격을 드러내는 징표이자 과시의 대상일 뿐 내적 성찰의 계기가 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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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자는 식민지 지식인과 대중이 “명작이 가진 인류 보편의 성찰에 대한 고민 없이 그 외양과 기호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교양의 아비투스를 모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지적하면서 “근대성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물질성과 계급 상승의 욕구로 이해한 것”이 바로 ‘속물교양’의 기원이라고 말한다.[20]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 한국에 처음 번역되었을 당시의 일화에서 이런 모습이 징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태준의 소설 『사상의 월야』[21] 등장인물 이송빈은 『레미제라블』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도, 장 발장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의 생애를 보면서 “성공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을 따름이다.[22] 심지어 번역자 민태원 또한 장 발장의 죽음을 통해 빅토르 위고가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던 주제의식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민태원이 끝내고 싶어 하는 부분은 장 발장이 행복해하는 부분인 ‘선남선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부분이다. 해피엔드를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재판장에서 장 발장이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 자신을 구성해내는 그 지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법보다 우월한 것이 바로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득해내지 못한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구원이 어떻게 해서 양심을 가진 장 발장의 내면으로 이행하는지는 번역되지 않았다. 양심을 가진 근대적 주체의 탄생, 이 장면은 번역은 되었지만 해석되지 않은 것이다.[23]

소설의 의미를 극히 피상적인 차원에서밖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유명한 작품의 목록은 줄줄 나열하는 식민지 독서인의 모습은 교양이라는 것이 어떻게 소비되고 유통되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제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에 대한 개인적 저항’이라는 의미마저 완전히 탈각된 채 온전히 지위 경쟁의 한 양태로서, 즉 교양이 일종의 물신이 된 ‘교양물신주의’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교양물신주의의 출현은 곧, 입신출세주의와 교양주의가 ‘동전의 양면’ 같은 차원을 넘어 구별 불가능할 정도로 일체화되었음을 뜻한다.

박권일 / 사회비평가 



[1] “立身行道揚名於後世以顯父母孝之終也”; 김학주 편저, 『효경(孝經)』, 명문당, 2006, 62쪽 
[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b, 2006, 75쪽 
[3] 소영현, 「전쟁 경험의 역사화, 한국사회의 속물화」, 『한국학연구』 32권, 2009, 298쪽 
[4]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푸른역사, 2003, 190쪽
[5] 가토 슈이치 외, 이목 옮김, 『교양, 모든 것의 시작』, 노마드북스, 2007, 57쪽
[6] 미야지마 히로시, 같은 책, 233쪽 
[7] 박정양, 『박정양전집』 4, 아세아문화사, 1984, 268쪽
[8] 배규숙, 「대한제국기 관립의학교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26쪽
[9] 소영현, 「근대 인쇄 매체와 수양론ㆍ교양론ㆍ입신출세주의- 근대 주체 형성 과정에 대한 일고찰」, 『상허학보』 18집, 2006, 203쪽
[10]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이러한 풍조를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이념화했고 법학자 이치키 키토쿠로(一木 喜德郎)와 그의 제자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기존의 천황주권설에 반하여 천황기관설을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천황기관설은 천황이 국가기관 중 최고의 위치를 점하지만 신격적 초월성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헌법학설로, 국왕제와 의원제를 공존시키기 위해 절충적으로 고안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일본사회를 여러 면에서 진보시켰지만, 정당정치는 끝내 민주주의를 안착시키는데 실패했고, 1931년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11] 1918년 법 개정으로 공사립 고교가 인정되기까지 메이지 시대의 구제고등학교, 즉 제1(도쿄)제2(센다이), 제3(교토), 제4(가나자와), 제5(구마모토), 제6(오카야마), 제7(가고시마), 제8(나고야) 고교는 제국대학 입학이 자동 보장되었다. 1925년부터는 제국대학 문학부 입학시험이 도입되었으나 1945년까지 구제고교의 90%는 제국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원지연, 「근대일본에서 학교제도의 보급과 학력주의의 형성」, 『외대사학』, 12(1), 역사문화연구소, 2000, 616-617쪽
[12] 원지연, 「근대일본에서 학교제도의 보급과 학력주의의 형성」, 『외대사학』, 12(1), 역사문화연구소, 2000, 623쪽
[13] 高田 里惠子, 『文学部をめぐる病い―教養主義・ナチス・旧制高校』, 筑摩書房, 2006, 206; 윤대석, 「경성제대의 교양주의와 일본어」, 『대동문화연구』 59, 2007, 118쪽에서 재인용
[14] 매슈 아놀드, 윤지관 역, 『교양과 무질서』, 한길사, 2006, 75쪽
[15] 매슈 아놀드, 같은 책, 77쪽
[16] 매슈 아놀드, 같은 책, 63쪽
[17] 유진오, 「편편야화」 27회, 동아일보, 1974.4.1.
[18] 윤대석, 같은 책, 116쪽
[19] 윤대석, 같은 책, 128쪽 
[20] 박숙자, 『속물교양의 탄생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푸른역사, 2012, 17쪽
[21] 이태준, 『사상의 월야』, 『매일신보』, 1941.3.4.-1942.7.5
[22] 박숙자, 같은 책, 93쪽
[23] 박숙자, 같은 책, 93쪽